유혜영 ㅣ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당대회가 끝이 났다. 8월17~20일(민주당), 8월24~27일(공화당) 치른 전당대회를 날마다 2시간씩 빠트리지 않고 지켜보고 나니 트럼프 대통령과 트럼프 지지자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가상의 미국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당은 전당대회가 열린 1832년 이래 사상 처음으로 온라인으로 ‘버추얼 전당대회’를 치렀다. 민주당은 나흘 동안 트럼프 행정부의 무능한 코로나19 대응을 부각했다. 트럼프 대통령 말만 믿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 않고 마스크도 안 쓴 채 친구들과 만났다가 코로나19에 감염돼 숨진 애리조나주에 살던 한 남성의 딸은 “우리 아빠의 유일한 ‘기저 질환’은 트럼프를 철석같이 믿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전 미국으로 확대된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 시위 이야기, 구조적 인종차별 문제를 꼭 해결하자는 주장도 나흘 내내 비중 있게 다뤄졌다.
사흘 뒤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마치 우리가 모르는 평행우주가 있는 것처럼 전당대회에 나온 연사들은 트럼프 대통령 치하의 미국이 얼마나 위대해졌는가를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확진자가 600만명에 육박하고, 18만명 넘는 사람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었다. 전세계가 미국의 코로나19 대응에 실망했지만, 공화당 전당대회에 연사로 나선 간호사, 의사, 환자, 주지사들은 모두 트럼프 대통령의 훌륭한 리더십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로 피해를 줄였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끔찍한 ‘중국 바이러스’로 수백만명이 죽었을 거라고 말했다.
흑인 유권자의 90%는 민주당을 지지한다. 공화당은 동원할 수 있는 흑인들을 최대한 무대에 세웠다. 현직 흑인 의원, 전직 미식축구 선수 등 연사들은 공화당이 노예를 해방한 링컨의 정당이며, 자신들의 성공이 피부색에 상관없이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의 방증이라고 설파했다. 전당대회 전날 위스콘신주 커노샤에서 무장하지 않은 흑인 남성 제이컵 블레이크가 자기 차에서 경찰이 쏜 총 7발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돼 사경을 헤매게 됐다. 그러나 공화당은 경찰의 폭력과 그 기저에 있는 구조적인 인종차별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평화로운 시위대에게 총을 겨눠 전국적인 비난을 받았던 부유한 백인 커플은 연사로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면 언제든 여러분의 ‘조용한’ 동네에 폭도들이 나타날 수 있다. 질서와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뿐이다.”
공화당은 무고하게 숨진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을 해체하겠다는 급진 좌파 민주당으로부터 경찰관을 보호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도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4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에서 꼭 해오던 중요한 절차가 당의 강령을 보완하고 수정해 새로 채택하는 일이다. 그러나 공화당은 관행을 깨고 강령을 따로 채택하지 않았으며, 그냥 트럼프 대통령의 어젠다 “미국이 최우선”(America First)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공화당이 보수의 가치를 지키고 민주당과 미국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경쟁하는 공당이 아니라 트럼프라는 개인을 위한 사당이 됐음을 자인한 꼴이다. 트럼프와 생각이 다른 공화당원들은 공화당 전당대회에 초대받지 못했다. 전통적인 공화당원으로 분류되는 존 케이식 전 오하이오 주지사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은 민주당 전당대회에 연사로 나섰다.
트럼프는 그렇게 2020년 공화당의 뉴노멀이 됐다. 올 11월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너무 깊고 미국 공화당이 트럼프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코로나19로 무너진 미국 경제가 회복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