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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좋은 의사’라는 판타지 / 엄지원

등록 2020-08-30 17:49수정 2020-08-31 08:33

엄지원 ㅣ 사건팀장

직업인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의 관점은 대개 두 가지로 갈린다. 검사, 경찰, 기자, 국회의원 등은 대중매체 속에서 더할 수 없이 부패한 존재이거나 현실에 없는 정의의 사도로 그려진다. 이들이 부패할수록 스토리는 흥미를 더하기 마련이다.

‘직업물’ 가운데서도 특별 대우를 받는 직업이 의사다. 의사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은 대개 ‘판타지물’이다. 신의 손과 인간의 심장을 가진 외과의사가 생사기로에 놓인 환자들을 살려내는 영웅담 또는 뜨거운 직업정신을 가진 젊은 의사들이 만들어가는 성장담이 주를 이룬다. 1970년대 데즈카 오사무의 <블랙잭>을 필두로 일본의 코믹스에선 이런 의료만화가 한 계보를 이루고 있다. 국내에서는 주로 드라마를 통해 의사 판타지물이 인기를 얻었다. ‘허준’에서 출발한 한국인들의 의사 판타지는 <종합병원>, <하얀 거탑>, <낭만닥터 김사부> 등으로 끝없이 재생산돼왔다.

이런 작품들을 ‘판타지물’로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에서 블랙잭이나 김사부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사람을 살리는 인술을 행하는 의사는 죽고 사는 문제를 다루는 ‘바이탈과’에서만 만날 수 있다. 내과·외과·흉부외과·응급의학과·산부인과 등이다. 의대에서 이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묶인다. ‘흉비외산’. 업무 강도는 높고 의료사고 위험은 큰데다 보상은 비교적 약한 기피과들이다. 만성적인 인력난은 해당 전공을 택한 의사들을 더욱 팍팍한 현실로 내몬다. 인의가 되리라 마음먹고 의대에 입학했다 해도 놀라운 사명감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으로 향하는 게 인지상정이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의사들에게 그 ‘놀라운 사명감’을 기대하긴 점점 더 어려울 것 같다. 의사가 되는 데 필요한 요건은 사명감이 아니라 학업성적인데, 부모 자산과 자녀 성적의 연동률이 갈수록 높아져서다. 상위 0.5% 성적의 의대생들을 키워낼 수 있는 이들은 고소득층이다. 실제로 의대생들의 상당수가 고소득층 자녀다. 2018년 한국장학재단 자료를 보면, 국가장학금 등을 신청해 가계 소득이 확인된 서울 주요대학 의대 학생 1843명 중 고소득층에 해당하는 소득 9·10분위 학생은 55%다. 기초생활수급자(29명)와 차상위계층(33명)에 견줘 소득 10분위(701명)와 9분위(311명)가 압도적으로 많다.

의대생과 전공의 등 젊은 의료인력들의 반발은 그 두 가지 맥락을 모두 돌아볼 때에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싸움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몰빵’한 의사·의대생들의 밥그릇 투쟁 성격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기피과의 문제가 단순히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공공의료의 문제도 더 정교한 해법이 필요하단 점에서 정부의 접근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다.

직업인으로서 의사들도 필요하다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은 국민 곁에서 함께 아파해야 할 때”라는 어느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마음을 울린다.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병원에서 지켜본 이라면 왜 우리 사회가 병원 판타지물에 열광하는지 잘 알 것이다. 중환자실의 의사와 환자. 그토록 일방향적인 관계는 이 세상에 별로 없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조처가 무엇인지는 의사만이 판단할 수 있다. 환자의 가족은 의사의 한마디에 맹종하는 수밖에 없다. 그 일방적 관계 앞에서 누구나 내가 만난 의사가 명의이자 인의이길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의사’는 모두의 판타지다.

코로나19 대유행의 기로에 선 우리 사회는 응급처치 중인 환자나 마찬가지다. 이번 집단휴진 사태는 그런 의미에서 의사에 대한 국민적 판타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30일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집단휴진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역설적으로 국민에겐 의료체계 수술이 필요하단 생각만을 안겨준 결정이 아닐까.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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