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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과학자와 의사의 수 / 김우재

등록 2020-08-31 17:42수정 2020-09-01 02:40

김우재 ㅣ 초파리 유전학자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부처 서열 17위의 과학기술처를 8위의 과학기술부로 승격하고, 대통령이 의장을 맡는 과학기술정책의 최고의결기구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출범시켰다. “세계 일류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자가 존경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하던 그는, 취임 이듬해 과학기술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두뇌한국21(BK21) 사업’을 전개했다. 이 사업의 성과로 국내 이공계 대학원은 양적으로 성장했고, 한국은 이제 국민총생산 대비 연구개발비가 세계 1위인 나라가 됐다.

역설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공계에 엄청난 국가세금을 쏟아부었음에도 정권 말기에 이공계 기피 현상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은 사회적 화두가 됐고,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공계 대학 학부생에게 엄청난 편익을 줬다. 하지만 정부의 이공계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의대나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진로를 틀었다. 박사인력 과잉공급과 일자리 부족으로 발생한 문제를, 학부생 수나 맞춰 생색내려던 관료주의의 참사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야심차게 추진했던 두뇌한국21 계획은 한국 과학기술의 양적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과학기술인의 삶을 저하시켰다. 김대중 대통령의 과학기술계에 대한 선의조차 과학기술인을 조선시대의 관노처럼 인식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공계 박사학위의 과잉공급으로 야기된 학위공장 문제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20세기 말 인간유전체 계획의 등장과 연구대학들의 폭발적인 등장으로 이공계 박사학위자 수는 폭증했고, 그에 맞춰 늘지 않은 일자리 때문에 고학력 실업자 수도 동반 상승했다. 과학계에 이공계 박사들의 사회적 지위와 학문후속세대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인들은 의사나 변호사처럼 협회와 자격증을 만들어 자신들의 인원수를 조절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는 과학기술인력을 일종의 사회적 공공재로 관리한다. 당사자들도 의사나 변호사처럼 이익집단을 만들어 수를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국은 헌법에 과학기술과 관련한 조항을 꽤 많이 둔 나라다. 심지어 헌법 제127조 제1항은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을 근거로 과학기술기본법 등이 만들어졌고, 한국의 과학기술인은 헌법에 의해 국가의 관리대상이 되는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현실적인 노예가 된다. 흥미롭게도 의료와 관련된 헌법 조문은 제36조 3항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구절뿐이다. 2019년에야 제정된 보건의료인력지원법으로 의료인력은 드디어 국가의 관리대상이 되었다. 그러니 한국에서 의사는 특권이 맞다. 얼마 전까지도 의사 수를 조절하려면 국가가 기득권인 의사들의 허락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인은 그래서 의사가 부럽다. 거의 비슷한 훈련기간을 소비하고도 박봉에 국가의 관리나 받는 과학기술인은 협회 같은 걸 만들 생각도 안 하고, 파업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한다.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지위는 국가가 알아서 챙겨주려고 노력하긴 하는데, 그래도 항상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장점도 하나 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과학기술인이 국가경제를 발전시켜 왔다는 걸 국민이 잘 알게 됐는지, 과학기술에 투자하자는 데 반대하는 국민은 한 명도 없고, 가장 신뢰하는 직업에서도 과학자가 1위다. 과학기술인 대부분은 힘든 상황임에도 과학기술인 수를 줄이자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작업에 깃든 공공성을 그래도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그들이 안타까우면서도 애잔하다.

공공의료인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수십년이 되었고, 이제 문재인 정부가 그 칼을 뽑아든 모양이다. 의사들의 공익사회 진출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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