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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디지털 대면의 일상화와 변화하는 감각들 / 권김현영

등록 2020-09-01 17:45수정 2020-09-02 15:13

권김현영 ㅣ 여성학 연구자

연아씨는 자신을 전업주부라고 소개했다. 내가 알기로 연아씨는 프리랜서 강사다. 얼굴에 물음표가 달린 걸 보았는지 연아씨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코로나 이후 개점휴업이에요. 남편이 재택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아이들 온라인 수업까지 챙기다 보면 딱 과로사 직전인데 막상 제 일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본업은 개점휴업 중이지만, 시시때때로 남편의 직장일을 돕는 직원이 되기도 하고, 담임선생님의 업무를 보조해주는 보조교사가 되기도 해요. 그렇게 일은 많은데 막상 저는 보이지 않아요. 제가 그 일들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에요. 연아씨는 50만원의 프리랜서 지원금을 받았다며 비슷한 상황에서 유사한 시간표로 일하고 있는 주위의 전업주부 친구들이 부러워했다고 했다. 연아씨는 그 지원금이 자신의 고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이 돈이 일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걸 알고 마음이 복잡해졌다고 했다. 코로나로 인해 수입이 감소된 걸 증명하면 돈이 나오는데, 코로나로 인해 더 많은 가사노동과 각종 매니저 일을 한 건 아무 곳에서도 보상받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 않으냐는 연아씨의 질문은 더없이 정확했다.

혹자는 ‘언택트’가 아니라 디지털 기술이 매개된 ‘디지택트’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언택트는 비대면으로, 디지택트는 디지털 대면이라고 번역하는데, 비대면보다는 정확한 말이지만 현실을 담아내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디지털 대면이라는 말은 디지털 연결 노동 과정을 숨긴다. 나의 경우에도 강의를 대면에서 디지털 대면으로 바꾸기 위해 추가 노동을 해야 했다. 단지 과부하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이 디지털 대면이라는 환경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사라져야 한다. 디지털 대면은 실제 대면이 차지하던 면적과 의미를 축소시키면서 등장한다. 접근권도 문제다. 비대면 사회는 휴대전화와 개인용 컴퓨터 등의 디지털 기기를 가지고 와이파이망에 무리 없이 접속할 수 있으며 방해 없이 자기만의 방을 가진 사람을 전제한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디지털 대면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매번 새롭게 조율과 협상을 해야 한다. 사회적 감정의 문제는 어떤가. 주거 기준에 미달하는 곳에서 살고 있는 주로 1인가구 생활자들은 주거공간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만들어서 버텨왔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이후에 그런 버티기 전략이 불가능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강화된 이후 고시원에서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일주일을 보냈다는 은진씨는 무엇보다 ‘너무 외롭다’고 했다. 디지털로 만난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 상담을 하는 김영서는 10대들은 한번도 오프라인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온라인에서 활발히 교류했으면 당연히 지인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40대 이상은 오프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만을 지인이라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런 감각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인류학자 애슐리 몬터규는 서구 문명의 문제 중 하나를 미각, 후각, 촉각 같은 ‘근접감각’보다 시각, 청각 같은 ‘원격감각’에 의존하고 있는 점을 들었다. 인간은 다양한 감각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하고 그중에서도 촉감은 서로 다른 몸을 가진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등의 경험세계를 구축하는 역할을 한다. 코로나 시대 디지털 대면이라는 환경은 우리가 오감을 통해 경험했던 세계를 축소하고 시청각이라는 원격감각에 점점 더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다. 문제는 원격감각이 폭력에 대한 반응을 둔화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세계 최대의 아동성착취 사이트의 운영자 손정우의 아버지는 선처를 호소하며 “실제로 강간한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말했다. 디지털 성폭력이 확산일로를 거쳤던 이유 중 하나는 화면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청각만으로는 실감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디지털 대면이 점점 더 일상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디지털 연결 노동의 비가시화와 번아웃되고 있는 돌봄 노동자의 문제부터 폭력에 대한 감각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젠더 관점에서의 전반적인 재점검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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