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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형법 32장 개정을 바라며 / 배복주

등록 2020-09-02 17:55수정 2020-09-03 02:39

배복주 ㅣ 정의당 여성본부장

여고 시절에 진학 문제, 학교생활 문제 등으로 교사와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나의 팔 안쪽을 만지거나 허벅지 쪽을 만지면서 상담을 했다. 기분은 불쾌했지만 상담했던 친구들도 거의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냥 그런 줄 알았다. 선생님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설명도 없었다. 나 또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물론 학교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나는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와 연애하다 보면 서로 만나서 즐겁게 놀고 이야기하고 술도 마신다. 그리고 가끔은 모텔에서 ‘쉬고 가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하지만 ‘쉬고 가자’는 정도로 말하기 때문에 성관계를 포함하는지 서로 간에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애매한 상태에서 가는 경우가 많다. 애매한 상황에서 성적인 언동으로 이어지게 되었을 때, ‘키스해도 될까요?’ ‘포옹해도 될까요?’ ‘섹스해도 될까요?’라는 말을 하는 게 어려운 것일까? 사실 어렵다기보다 분위기를 깨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일하는 공간에서 상사의 기분을 맞추어야 하고 고객에게 친절해야 하고 동료와는 잘 지내야 한다. 그래서 성희롱이나 가벼운 신체적인 접촉은 대충 잘 넘어가줘야 갈등을 유발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다. 그래서 그냥 참고 넘어간다.

법률혼 관계이거나 비법률혼 관계의 공동체는 일상과 성적 관계를 전제한 공동생활을 한다. 서로에 대해 일정의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이 생략되곤 한다. 그래서 서로의 욕망에 대해 더 이상 표현하지도 않고 토론하지도 않는다.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도, 연애 상대에게도, 직장 상사에게도 ‘나는 당신의 행위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할 수 없는 순간이 더 많았다. 이렇게 살아온 삶의 모습이 성차별적인 문화를 수용하도록 내버려둔 무책임이라는 성찰을 하게 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나와 같은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하다.

학생들에게는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이 무엇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표현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내 몸에 대해 알고 결정하는 힘, 성적인 끌림을 표현하고 성적인 행동을 상대에게 질문할 수 있는 용기, 상대의 거절과 동의를 수용할 수 있는 태도 등을 배워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배움은 친밀한 관계에서 ‘키스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이 분위기를 깨는 말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는 언어로 인식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일하는 공간에서도 참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환경과 구조를 인지하고, 개선을 요구하고, 정당한 요구가 수용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일상을 함께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욕망을 표현하고 토론하는 게 필요하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성적 주체로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최근 정의당에서 발의한 형법 32장 개정안은 성적인 침해와 성폭력의 범죄행위 구성요소를 ‘동의’ 여부로 개정하고 위력을 이용한 성폭력의 적용 대상을 확대했다. 형법 개정은 개인의 성적 침해와 성폭력을 타자화하지 않고 일상의 문제와 연결하고, 반복되는 동의 없는 상태의 성적 침해를 중지하고 위력을 이용한 성폭력을 철폐하기 위함이다.

성폭력 개념은 사회적으로 학습하고 있는 개념으로서, 개인의 의사에 반하여 또는 동의 없이, 권력이나 힘의 차이를 이용하여 성을 매개로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다. 하지만 모든 성폭력 행위가 현행 법률에서 규정하는 성폭력 범죄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 공백을 줄여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법 개정과 함께 모든 개인이 성적 주체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의사를 묻고 확인하는 행위로서 ‘동의’는 법률용어로 수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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