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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칠레 개헌에 주목한다

등록 2020-09-03 17:46수정 2020-09-04 02:36

장석준 ㅣ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작년 말 세계인의 눈길은 칠레의 거리로 쏠렸다. 10월에 시작된 거리시위가 30여 명의 사망자를 내며 격렬하게 계속됐기 때문이다. 발단은 대중교통요금 인상에 대한 항의였지만, 시위대의 표적은 빈부 격차를 증폭시키는 사회경제체제 전반으로 넓어졌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칠레 소식을 듣기 힘들었다. 실은 해를 넘겨서도 시위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봄이 되자 칠레에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이끄는 우파 정부는 이를 시위를 끝낼 기회로 삼았다. 방역 조치의 일환으로 집회와 시위가 금지됐고, 이로써 다섯 달 가까이 지속된 항쟁이 일단 휴지기에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칠레 민중의 대궐기가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시위가 한 달을 넘긴 작년 11월에 의회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헌 관련 국민투표를 하기로 합의했다.

현 칠레 헌법은 1980년에 군부독재정권 아래에서 제정됐다. 비록 몇 차례 개정된 적이 있지만, 골격은 여전히 1980년 헌법 그대로다.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이런 낡은 헌법 대신 새 헌법을 제정하라고 외쳤다. 단지 과거 청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민들은 새 헌법 제정을 계기로, 민주화 이후에도 바뀌지 않은 시장지상주의 체제 대신 새로운 사회경제 질서를 세우길 바랐다.

궁지에 몰린 정부는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심정으로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원내 야당들과 합의해 2020년 4월에 개헌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국민투표 일정 역시 코로나19 대유행 탓에 연기되고 말았다. 원래는 4월26일에 할 예정이었지만, 10월25일로 늦춰졌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헌법 제정 절차다. 10월에 할 국민투표의 문항은 두 가지다. 첫째 물음은 새 헌법 제정에 동의하느냐는 것이고, 둘째로는 새 헌법안을 기초할 기구의 구성 방안을 묻는다. 구성 방안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돼 있다. 하나는 제헌의회를 완전히 새로 선출하는 안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의회와 새로 뽑은 시민 대표들이 각각 절반을 이루는 방식으로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안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거의 80%의 시민들이 새 헌법 제정에 찬성하며, 제헌의회를 완전히 새로 구성하자는 안이 다른 안의 두 배 가까운 지지를 받고 있다. 정치 세력 가운데는 주로 좌파 정당들이 새 헌법 제정을 적극 지지한다. 최근 지지율이 높아진 공산당,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급진좌파 ‘확대전선’이 이런 입장이고, 민주화 이후 중도파 연합을 이뤄온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당도 이를 따른다. 반대하는 쪽은 집권 우파 내 일부와 같은 극우 성향 정파들이다.

여론조사 결과대로 10월 국민투표에서 새 헌법을 제정하자는 쪽이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되면, 내년 4월에 지방선거와 동시에 제헌의원을 선출하는 제2차 국민투표를 할 예정이다. 제헌의회가 1년여의 활동을 통해 새 헌법안을 기초하면, 2022년 중에 제3차 국민투표를 해 새 헌법안 채택 여부를 최종 결정하게 된다. 이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몇 년간 칠레인들은 사회질서의 기본 골격을 둘러싼 대토론을 벌이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촛불 항쟁 직후에 이와 비슷한 헌법 개정 논의가 있었다. 개헌안까지 준비되기도 했다. 하지만 헌법 개정 과정에서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개헌안의 풍성한 내용 자체보다 그것을 이끌어내는 전 사회적 토론이라는 점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개헌 논의 자체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냥 그러고 말 일은 결코 아니다. 칠레에서 1980년 헌법이 그렇듯이 우리에게도 제6공화국은 이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족쇄일 뿐이기 때문이다. 칠레인들이 새 헌법 토론을 벌일 그때 이곳에서도 ‘제7공화국’ 운동이 시작되어야만 한다. 지금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 벌어지는 일은 정확히 우리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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