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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못난 아비의 육아법 / 김민식

등록 2020-09-07 14:24수정 2020-09-08 14:01

김민식 ㅣ <문화방송>(MBC) 드라마 피디

어려서 아버지에게 많이 맞았다. 우리 집 식구 중에 아버지에게 안 맞은 사람은 없다. 다 맞았다. 나는 아버지의 기대를 짊어진 장남이라 특히 많이 맞았다. 맞다 맞다 맞아 죽을 거 같아 도망친 적도 있다. 아버지는 매를 들고 동네 어귀까지 쫓아오다 포기하셨다. 다음부터 나는 옷을 홀딱 벗고 매를 맞았다. 맞으면서 고민했다. 맞아 죽는 편이 나을까, 쪽팔려 죽는 편이 나을까. 맞아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나 보다. 팬티 바람으로 달아난 적은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를 통째 외우는 게 방학 숙제였다. 하루에 한 과씩 외우는데, 검사를 하다 실수하는 날에는 또 매를 맞았다. 그때 나는 영어 공부가 죽도록 싫었다. 아버지가 영어 교사였는데, 영어 백날 잘해봤자 뭐 하나, 처자식 패는 못난 어른밖에 못 되는데. 맞으면서도 영어 실력은 늘지 않았다. 아버지를 향한 반항심 탓이다.

하루는 어머니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왜 하필 저런 사람과 결혼했냐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민식아, 너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어쩔 수 없단다. 그런데 네가 노력하면 정신적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 도서관에 가 봐라. 도서관에 가면 위인들의 삶을 기록한 책도 있고, 멋진 생각을 가진 저자도 많단다. 그중 좋은 어른을 찾으면 그분을 너의 정신적 아버지로 모시렴.”

1989년 대학 휴학하고 방위병 복무하느라 고향에서 지낼 때, 주말에는 아버지를 피해 도서관으로 달아났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게 가르침을 줄 어른을 찾아 책을 읽었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연락이 왔다. 독서의 달을 맞아 다독상을 시상하는데, 내가 최우수상을 받게 됐다고. “제가 도서관에서 몇 권의 책을 읽었나요?” 한 해 동안 200권의 책을 읽었단다.

그 시절,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을 쓴 앨빈 토플러에게 매료되었다. 21세기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그의 말에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영어만 잘하면 영어로 된 최신 정보를 입수하고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수 있을 테니까. 아버지가 매를 휘두르며 가르친 영어는 내게 상처였는데, 정신적 아버지인 토플러의 가르침에 따라 자발적으로 공부한 영어는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1995년에는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을 원서로 읽었다. 다가올 시대, 기계나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을 직업은 영상 미디어 산업의 창작자라는 말에 동시통역사를 그만두고 <문화방송> 피디로 입사했다. 아버지는 내게 육체적 고통을 안겨줬지만, 책에서 만난 정신적 아버지들 덕분에 삶이 더욱 즐거워졌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나도 아버지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건물을 물려주거나 재산을 남겨줄 형편은 못 된다. 최고의 유산은 책 읽는 습관이라 생각한다. 독서 습관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들에게 매일 밤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매일 밤 20분씩 책을 읽어줬다. 직업이 방송사 피디지만, 집에서는 절대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부모가 책을 즐겨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고의 독서 교육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두 아이와 서점에 갔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이 있다면 세 권까지 마음껏 고르라고 했다. 내 역할은 책을 사주는 데까지다. 읽을지 말지는 아이들 마음이다. 방학이 끝날 무렵, 물어보면 안 된다. “그래서 지난번에 사준 책은 다 읽었니?” 그 순간 마법이 깨어진다. 아빠가 사준 선물은, 아빠가 내준 방학 숙제가 되어 버린다.

아이가 어려서 책을 읽어달라고 할 때는 최선을 다해 읽어줬다. 독서 습관 형성에서 부모의 열정이 도움이 되는 건 중학교 입학 전까지다. 사춘기에는 부모의 과도한 열정이 역효과를 부른다. 나의 성적을 올리려는 아버지의 열정이 내게는 상처였다. 책을 향한 나의 열정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아비로서 부족한 점이 많다. 부디 아이들이 책에서 훌륭한 정신적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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