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변호사·법조문턱낮추기실천연대 공동대표
휴전이다. 의협(대한의사협회)이 일단 파업을 풀었다. 하지만 짐작건대 의대 정원 확대 등이 다시 추진된다면 의사 파업도 재개될 것이다.
파업의 최대 맹점은 객관적 사실 자체의 부인이다.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인 3.5명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런데도 의협은 우리나라 의사들은 ‘효율적’이라서 수 부족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3분 진료’가 환자 입장에서도 효율적일까. 주장의 이면엔 ‘의사 수 통제’를 통한 특권 유지의 바람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의사들만의 바람은 아니다.
대국민 법률서비스 문턱을 낮추겠다는 취지로 노무현 정부가 1000명 선발의 사법시험을 뒤로하고 입학생 2000명의 로스쿨 설립을 추진할 때 변협(대한변호사협회)은 거세게 저항했다. 당시 변협의 저항은 지금의 의협 못지않았다. 이후 로스쿨 출신 회원이 늘자 전략을 바꿨다. 해마다 변호사시험(변시) 합격자 발표일이면 변협은 시위까지 불사하며 ‘신규 변호사 배출 축소’를 외친다.
전문직 단체들은 전문직 수 통제, 전문직 피교육자 수 통제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먼저 자격을 취득한 것이 신규 진입 제한의 정당한 권리인 것처럼. 높은 보수나 특권이 대학입시·전문직시험 등의 좁은 문을 통과한 마땅한 대가인 것처럼. 하지만 전문직은 일정 기준만 충족하면 그 수가 몇이든 자격을 취득할 수 있어야 하고, 국가는 관련 교육 제공에 최대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직업의 보수는 노동의 대가여야지 좁은 문을 통과한 대가가 되어선 안 된다.
다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의 증원 비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의협은 인구당 의사 수가 오이시디 평균의 65.7%, 의대 졸업자 수가 58%에 불과하다며 증원 자체는 지지하면서도, 필수 진료과 및 지방의 공공병원 확충, 지속가능한 공공의사 양성 등 공공시스템 구축이 빠진 정부안을 비판했다. 자칫 사립의대 정원만 늘리고 소수라도 그나마 양성된 공공의대 졸업생들마저 몇년 근무 뒤 ‘먹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리한 지적이다. 로스쿨을 통해 변호사들이 다소 늘었지만 시민들의 법률적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누구나 경찰 수사 단계부터 변호사의 조력을 받는 형사공공변호인제도. 매달 몇천원의 보험료만 내면 언제든 법률 상담을 받고 성공보수 부담 없이 소송을 맡기는 권리보호보험제도. 로스쿨을 통한 법조인 증원은 선진국의 이런 공공 내지 보편적 법률 복지 시스템 구축 없이 출발했다. 그 결과 시민에게 변호사는 여전히 멀다. 또 시장에 내던져진 변호사들의 저항이 법무부를 흔들어 변시 합격률이 통제됨으로써 로스쿨 고시학원화, 변시낭인, 1000여명의 변시 평생응시금지자 등의 문제들이 야기됐다.
특히 외과·산부인과 등은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인 만큼 그 존폐를 시장에만 맡겨선 안 된다. 국방·치안·수도·전기 서비스에서 우리는 수익 창출을 기대하지 않는다. 공공재 서비스에서 적자가 나는 것은 당연하며 이를 민영에만 맡기는 것은 시민 보호의 포기다. 또 의료·법률 서비스가 공공시스템 안에 자리잡은 사회의 의사·변호사들에게 신규 진입자는 공포가 아니다. 큰돈을 벌 수는 없어도 보람된 전문서비스를 제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굳이 의료 봉사, 무료 변론을 하지 않아도 직업적 삶 자체가 봉사적이고 공익적일 수 있다.
공공시스템 구축 없이 의대 정원만 늘리면 의료계에서도 법조계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의협이 절대평가인 국시의 상대평가 전환을 추진하거나 채점을 왜곡해 상당수가 불합격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그 속에서 국시가 고시화되며 의대 교육이 무너질 수 있다. 시민의 의료서비스 문턱은 별반 낮아지지 않은 채.
지난해 밤샘근무 중 순직한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은 생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우리나라에 의사 수가 많다는 걸 의사 말고 누가 동의할까”라는 글을 남겼다. 전문직의 수는 통제되어선 안 된다. 다만 증원만으론 부족하다. 시민에게 가까운 전문 서비스, 정상적인 전문직 교육을 위해선 ‘전문 서비스의 공공 내지 보편적 복지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의사 파업이 일단락된 지금, 파업을 규탄하면서도 공공의료 시스템 구축을 간과한 개혁안도 비판한 인의협의 성명을 곱씹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