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기 ㅣ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청년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느슨하다. 실존하는 청년들에 대한 적확한 재현임을 스스로 주장하는 청년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경우 각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그저 청년이라는 말을 얹는 수준에 그친다. 최소한의 공통점인 연령을 제외하면 서로 너무 다른 청년의 형상들이 존재하고, 목적에 따라 편의적으로 참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청년 담론 및 관련 정책 논의를 할 때 ‘내가 청년인데’, ‘우리 아들도 20대인데’로 시작하는 말들에 대응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이 쓰인다.
정치 쪽이든 정책 쪽이든 관련 현장에서 가장 큰 피로감이 드는 건 바로 ‘보통 청년’, ‘일반 청년’, ‘진짜 청년’과 같은 레토릭을 마주할 때다. 그 자체로 보면 우리가 거스르기 쉽지 않은 한정어이지만, 실제 활용법을 보면 청년정치나 정책 맥락에서 반동적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이를테면 ‘국민의힘’과 같은 ‘좋은’ 정당 명칭이 결국 실제 그 정당이 대의하는 ‘국민’이 어디까지인지를 놓고 의문에 부쳐질 수 있는 것처럼, 모든 말의 평가에는 결국 맥락이 중요하다.
보통, 일반, 진짜라는 표현은 그 반대편을 특별, 특수, 가짜로 규정하는 효과를 생산한다. 청년에 대한 말하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통 청년이거나 그들을 대변한다고 말하는 일은, 동시에 자기 반대편의 누군가가 보통 청년이 아니며 그들을 외면한다 주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반 청년, 진짜 청년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말은, 다른 청년을 일반이 아닌 특수, 진짜 아닌 가짜로 규정하여 그 정당성을 훼손하는 발화이기도 하다. 물론 이 방식은 누구나 전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가장 배제되어 있는 청년의 목소리가 이렇게 제기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해방적 실천의 잠재력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방식은 매우 쉽게 역방향으로 전유당한다. 목소리를 내는 적극적 참여군의 청년들을 ‘활동가 청년’으로 범주화하면서 활동가 청년 말고 진짜 일반 청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고 실제 정책 실행에서 활동가를 배제하려 하는 지역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의 사례를 자주 듣는다. 환경이니 젠더니 하는 문제는 ‘과대대표된 소수 청년’의 것이고 그런 의제는 ‘보통 청년’의 삶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도 지겹도록 나온다.
보통 청년 말하기가 언제 해방적이고, 언제 보통 청년 ‘팔이’에 그치는지를 가르는 명확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에 해당하는 발화자들이 가장 배제된 청년의 목소리를 정말로 듣거나 대변하려는 의지로 그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저 현재 청년 영역 내부의 주류적 담론이나 정책에 뭔가 불만이 있어 그것을 폄훼하고 싶은 것뿐이다. 무언가에 반대하는 데 주요한 목적이 있기에 막상 보통 청년을 내세워서 하고자 하는 주장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대안 면에서는 불분명한 경향이 있다. 오히려 ‘보통 청년’의 행위주체성을 소거하면서 납작한 존재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 반대편에 있는 ‘활동가 청년’처럼 발화할 수 없는, 그래서 ‘보통 청년’을 말하는 자신에 의해 대변되어야 하는 존재, 혹은 생업에 대한 문제 이상의 정치적인 관심이 없는 존재로 격하된다.
지난 10여년간 청년 담론과 청년정책은 세대 내의 불평등 해소, 지속가능성, 실질적인 평등과 민주주의 강화 등 한국 사회의 내일에 관한 수많은 의제를 매개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청년 모두를 실제로 포괄하는 것도, 모두에게 지지받는 것도 아니었지만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상호주관적인 정당성을 갱신해온 담론 자체의 역사가 있다. ‘보통 청년’과는 관련 없다는 임의적인 주장으로 쉽게 비판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좀 더 논리적으로 정합한 청년 담론들이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꾸 지난 역사를 의도적으로 망각하여 시계를 돌리는 논의들은, 단순히 말해 매우 피곤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