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_06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선점을 경쟁하는 발전주의는 문명의 원동력인 양 위세를 부린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이 인간의 사용처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재생산하는 주요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비대면은 중요하다. 그러나 대면을 피할 공간이 없다. 부동산(不動産),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재산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금을 사는 게 어떨까.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인종, 계급, 젠더를 둘러싼 고정관념이 있다. 물론 흑인, 여성,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편견이 강하고 대개 ‘생물학’이 근거로 동원된다. 두 가지로 대응이 가능하다. 하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차이는 개인차일 뿐, 집단 전체를 특징지을 수 있는 동일성은 없다. 또 하나는 ‘현실’임을 인정하고 이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여성은 주차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는 그만큼 주변을 살피는 안전한 운전자라는 의미다. 편견(偏見)은 말 그대로 치우친 생각이기에, 다른 치우친 생각으로 제압(?)하면 된다. 성별과 수학의 관계를 보자. 수학 과목의 대수 점수에서는 남녀 차이가 별로 없는데, 기하에서는 여학생의 점수가 낮다는 보고가 있다. 융합적 사고는 정보를 가공하는 능력이다. “역시 여성은 수학에 약해”라는 통념을 믿지 말고, 이를 새로운 사유의 자원으로 생각해야 한다. 비슷한 예로, 여성은 노동시장 참여 여부와 관련 없이 “집사람”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집사람. 여성은 집인가? 사람인가? 혹은 집에만 있는 사람인가? 남성은 아무리 두문불출해도 집사람으로 불리지 않는다. 이는 성별에 따라 똑같이 집을 나가도, ‘도를 닦는 출가’와 ‘위험한 가출’로 구별하는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여아는 남아에 비해 ‘곱게’ 키워야 하기 때문에 야외 활동량, 여행, 운전을 통제하는 문화가 있다. ‘적절한 수동성’이 바람직한 여성성으로 여겨지는 문화는 여성의 공간 지각력에 영향을 미친다. “지도를 못 보는 여자, 남의 말은 안 듣는 남자”는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즉 생물학적 적응의 결과이다. ‘시간’에서 ‘공간’으로 문제는 드러난 팩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데이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같은 데이터로 다른 결론을 내는 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 융합에 필요한 핵심 요소 중 하나는 관점이다. 관점에 따라 데이터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점은 당파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는 훈련이다. 위 이야기는 성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공간(space)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사람에게 적용되고, 그로 인해 사회적 억압이 발생하는가. 공간에 대한 사고방식이 사회를 구성하는 예이다. 공간 개념은 차별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 성별에 따른 공간 지각력은 서구 철학에서 공간을 다루어 온 방식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플라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그들 사고의 중심 주제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시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했다. 원시 사회-봉건제-자본주의 등 문명의 발전에 따라 서열화된 역사, 역사를 과거의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 “세계 최초 그래서 최고”, “~ 아버지”라는 말처럼, 시원(始原)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한 사회의 역사밖에 서술하지 못한다. 세계 200여개국이 동시에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지역마다 삶이 다른데, 하나의 시간을 기준으로 사유하면 ‘문명인, 야만인’ 같은 구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시간 중심의 사고는 하나의 사회(서구)가 기준이 되어 강자 중심의 보편성을 만든다. 나머지 사회는 서구를 따라잡아야 할 역사의 대기실로 간주된다. 타자(the others)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단일한 시간개념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오늘날 서구의 패권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다. 이때 선점을 경쟁하는 발전주의는 문명의 원동력인 양 위세를 부린다. 자연은 파괴(정복)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 사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지구의 비명이자 복수이다. 이제까지 공간개념은 시간적 진보를 증명하는 도구―“그 시대 위대한 건축물”―였다. 공간은 인식론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인간의 인식 대상, 그릇(用器), 미지의 세계 등 인간 생활의 결과물로 간주되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로 지구를 들어 올릴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했지만, 그 이론은 지구 밖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즉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아르키메데스의 예는 체현되지 않는 지식을 생산해 온 백인 남성 중심 사고의 전형이다. <제2의 성>만큼 남성의 초월성에의 욕망을 비판한 책도 드물 것이다. 보부아르는 노예와 여성은 노동하는 ‘내재적’ 존재로서 열등하고 지식인 부자 남성은 세상사로부터 벗어난 ‘초월적’이고 우월한 존재라는 인식을, ‘만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여성은 평생 일상에 매여 사유와 지식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기껏해야 남성이 상상한 ‘어머니 대지’였다. 문학사에서 거의 모든 비유는 젠더, 몸, 자연, 공간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남성의 사유가 투사된 것이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 중심의 인식론을 개척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소련의 멸망 원인 중 하나를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도농 분리, 도시 중심의 국가운영이라고 보았다. 그는 공간이 인간의 사용처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재생산하는 주요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경험하는바, 여행을 다녀오거나 다른 공간을 체험하면 다른 인간이 됨을 이론화한 것이다. 집의 크기와 구조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시대다. 지금 한국 사회는 부동산 문제를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집이 교환가치가 된 현실도 기가 막힐 판인데, 재산 증식 수단의 최고 상품이라니. 인간은 공간을 차지하는 주체가 아니다. 우리가 소유와 인권을 분리하는 사회를 지향한다면, 집은 누구에게나 평생 임대 개념의 주거 공간이 되어야 한다. 토지를 임대하고 부를 창출하는 지주(집주인)-소작농(세입자)의 관계는 공간과 노동을 분리시킨다. 경자유전(耕者有田), 토지 소유권은 직접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 집은 사는 곳이지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다. 홈리스에 대한 편견도 공간을 소유해야 시민권을 갖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 때문이다. 홈리스야말로 무소유의 자유인이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운영되는 쉼터가 필요할 뿐이다. 노숙자보다 자기 관리를 못하는, 집에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비대면 공간이 없는 상황 코로나 시대 최대 아이러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반드시 실천해야 하지만 ‘사회’의 대안으로서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다. ‘집콕’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생활이 아니다. 주거가 불안정한 사람, 가정폭력과 노동으로 집이 지옥인 사람, 종일 보살핌 노동에 지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리적 거리두기인데, 집에서 물리적 거리두기가 가능한가. 거리두기가 공적인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된 것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양육이다. 특히 도시의 경우 웬만큼 넓은 평수(최소 1인1실)에, 동거인들과 사이가 좋고, 가사 분업 잘되는 가구가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집은 집 자체로 좁고, 세간살이 때문에 작다. 누구나 한번쯤 빌딩숲을 지나가다 하는 말이 있다. “세상에 이렇게 건물이 많은데, 내 집 한 칸이 없다니….” 코로나 스트레스는 곧 공간 스트레스다. 이 스트레스를 상업화하는 움직임도 빠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인테리어 산업은 호황이고 반려식물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텔레비전의 집 관련 프로그램을 보자. <구해줘 홈즈>, <신박한 정리>, <나 혼자 산다>, <온 앤 오프>, <바퀴 달린 집>, <여름방학>, <나의 판타집>, <홈데렐라>, (무인도에서)<삼시 세끼>, <자연스럽게> 등 다른 집을 경험하는 환상과 욕망의 세계를 보여준다. ‘인간은 지구를 정복했다’. 그러나 자기 한 몸 누일 공간이 없다. 톨스토이의 장편(掌篇) 제목대로,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지금 우리 사회에 집이 부족한가? 아니면 건설회사만 넘치는가? 어느 지역에 사느냐, 어느 동(洞)에 사느냐, 몇 평에 사느냐로 내 인격이 규정되던 시대조차 지났다. 코로나 시대에는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갈 곳이 없다. 코로나 시대 부동산 문제는 투기, 교육(학군)을 떠나 생존 이슈다. 비대면은 중요하다. 그러나 대면을 피할 공간이 없다. 부동산(不動産), 말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재산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금을 사는 게 어떨까. 휴대 가능하고 세금도 적고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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