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샤론이 부모에게 편지를 보냈다. ‘기숙사에서 불이 나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다쳤지만 거의 나았다. 119를 불러주고 병실에 위문을 와준 주유소 직원과 사랑에 빠졌고, 배가 부른 상태다. 애인은 고졸이고, 인종도 종교도 다르지만 좋은 사람이다.’ 이런 내용을 잔뜩 쓴 뒤, 덧붙인다.
‘엄마, 아빠. 사실 불난 적도 없고, 임신하지도 않았어요. 다만 역사 디(D), 화학 에프(F) 학점을 받았을 뿐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미국 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가 쓴 <설득의 심리학>에서 ‘대조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사례다. 앞의 메시지와 뒤의 메시지 사이 차이가 클수록 사람들은 강도가 약한 메시지를 무시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샤론은 앞에 충격적인 얘기를 열거함으로써 실제 잘못(학업 부진)은 사소하게 느껴지게끔 했다. 치알디니는 샤론이 화학은 낙제지만, 심리학은 최우등일 것이라고 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0일 극우세력의 개천절 집회를 ‘3·1 운동’에 비유했다. 그는 “개천절에 또다시 대규모 거리집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고 운을 뗐다. 그러곤 바로 “1919년 스페인 독감이 창궐해 13만명의 동포가 사망하고 온 나라가 패닉에 빠진 와중에도 애국심 하나로 죽음을 각오하고 3·1 만세운동에 나섰던 선조님이 생각돼 뭉클하다”고 말했다. 그다음에야 “지금은 코로나19를 극복하느냐 아니면 무너져내리고 마느냐 가늠하는 절체절명의 시기”라며 “부디 집회를 미루길 두 손 모아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목숨 건 독립만세운동에 견주며 극우세력의 집회를 한껏 칭송한 뒤에야 저자세로 집회 연기를 부탁한 것이다. 대조 효과 이론대로라면, 앞의 강한 메시지에 눌려 뒤의 메시지는 무게 있게 다가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전광훈 목사 지지 세력인 8·15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주제넘은 얘기”라며 일축했다.
일부에선 ‘개천절 집회에 터무니없는 정당성을 부여해 사실상 집회를 하라는 신호를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극우 집회에 일장기가 안 빠지는 점을 들어 ‘일장기 휘날리는 게 3·1 운동이냐’고 꼬집기도 했다. 김 위원장도 심리학은 에이(A), 역사·수사학·정치는 낙제점을 받았을 것 같다.
손원제 논설위원 won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