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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삼성 범죄에 숨은 부스러기 / 김경락

등록 2020-09-15 16:59수정 2020-09-16 02:40

김경락 ㅣ 산업팀장

2년 가까이 수사를 한 검찰이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수뇌부를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공장 바닥을 뜯어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증거인멸부터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한껏 추어올린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수조원대의 회계 분식, 엄두를 내는 것조차 쉽지 않은 대형주에 대한 대담한 시세 조종 등이 검찰이 꼽은 이들의 중대 혐의이다. 법과 증거, 법관의 양심에 따라 단죄가 이뤄질 것이고 그래야 한다.

공소장에는 검찰이 주요 범죄 혐의에 넣지 않았지만 일반인 눈으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삼성 행태도 담겨 있다. 향후 법정에서도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낮지만, 그렇더라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

2015년 6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위해 지원사격에 나선 삼성증권의 일탈 행위가 눈에 띈다. 당시 물산의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던 터라 물산 주주들의 합병 찬성 의결권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는 게 이 부회장에게는 중요했다. 여기에 삼성증권이 동원됐다. 공소 사실에 따르면, 물산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주주명부에 담긴 개인정보를 삼성증권에 몽땅 넘겼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사업자등록번호), 거주지 주소, 전자우편 주소, 보유 주식 종목·수량과 같은 민감 정보들이다.

삼성증권은 넘겨받은 정보와 본인들의 고객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자신들의 고객이면서 동시에 물산의 주주인 개인투자자들을 추출해냈다. 목적은 단순했다. 삼성증권은 전국 곳곳에 뻗쳐 있는 지점망을 활용해 물산 주주이자 삼성증권 고객들에게 물산-모직의 합병 찬성 권유 활동을 벌였다.

검찰은 이 행위에 대해 ‘개인정보 유용’이란 표현을 쓰며 ‘이해상충’이라고 성격을 정의했다. 금융회사가 고객의 이익이 아닌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 ‘뛰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삼성증권 경영진 등에 대해선 별도의 법적 조처를 내리지는 않았다. 대형 범죄의 부스러기 혐의 정도로만 여긴 게 아닐까 짐작된다.

검찰은 부스러기로 봤을지 모르지만 금융적 시각에서 볼 땐 삼성증권의 행위는 재벌그룹의 금융계열사가 갖는 고유의 리스크를 실사판 영화로 보여준 사례이다. 금융업은 타인 자본(고객의 돈)을 중개·운용해 그 타인의 부를 늘려주고 자신들은 수수료를 받아 이윤을 남기는 업종이다. 금융의 핵심 가치를 ‘신뢰’라고 보는 이유는 남의 돈을 맡아 관리하기 때문이다. 총수의 이해 앞에 신뢰란 가치가 손쉽게 무너지는 금융사는 그 자체로 리스크이다.

신뢰의 가치는 동원된 삼성증권 임직원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그랬을까. 당시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윤용암씨였다. 그는 생명·화재·자산운용 등 삼성 금융계열사를 두루 거친 터라 그룹 내 금융통으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그의 뿌리는 삼성 회장 비서실(옛 미래전략실)에 있다. 그는 1990년대 중반, 이번 사건으로 피소된 장충기(미래전략실 차장·사장)·김종중(미래전략실 전략팀장·사장) 등과 한솥밥을 먹었다. 미래전략실 생리를 잘 아는 윤씨가 미래전략실과 그 뒤에 있는 총수의 요구를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난달 31일 금융위원회는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삼성처럼 금융과 산업을 함께 아우르는 그룹이 본연적으로 갖는 위험을 관리하는 게 목적이다. 2년여 전 금융당국이 마련한 이 법의 초안에는 금융 경력이 취약하나 그룹 내 비서실 힘으로 금융계열사 주요 경영진에 오는 걸 제한하는 ‘인적 방화벽’을 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총수가 인사권으로 금융사를 쥐락펴락하는 관행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 관행은 한국의 금융 후진성을 낳는 요소라는 판단도 있었다. 한데 이 내용은 재계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며 초안 공개 두어달 만에 쏙 빠졌다. 정부·여당이 재계에 밀려 한껏 후퇴한 것이다. 2018년, 현 정권의 힘이 탄탄하던 때의 일이다. 물러난 거리만큼 2015년 삼성증권과 같은 일탈이 재연될 위험도 커졌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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