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숨&결] 좋은 의사란 무엇인가 / 이길보라

등록 2020-09-16 15:02수정 2020-09-17 02:42

이길보라ㅣ영화감독·작가

최근 정부와 여당이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등 4대 의료정책 추진을 진행하자 의료계가 강하게 반발하며 집단 진료거부 및 휴진을 했다.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료정책연구소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동시에 의사들의 집단행동의 정당성을 강조하고자 홍보물을 만들었다. 아래와 같은 2지선다형의 문제가 실려 있다.

당신의 생사를 판가름 지을 중요한 진단을 받아야 할 때, 의사를 고를 수 있다면 둘 중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A.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

B.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의사

홍보물을 보자마자 왜 객관식 유형인지 의문이 들었다. 좋은 의사란 무엇인가. 전교 1등 의사인가, 성적이 모자라는 의사인가. 성적이 좋은 의사를 결정하는가. 의사란 과연 무엇인가.

네덜란드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어렸을 때 이주하여 네덜란드 의대를 졸업하고 흉부외과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H는 말했다.

“저는 단순 암기식으로 문제 푸는 거 잘한다고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의사에게 중요한 건 의사소통 능력이에요. 환자가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지를 찾아내는 게 의사의 일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보라씨가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의사소통에 능하니까요.”

아니, 내가 감히 의사를? 의사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 아닌가. H는 요새 시 외곽 지역에서 진료를 본다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주로 살아요. 땅값이 비싸지 않은 동네다 보니 저소득층이 많이 살고요.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어,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환자가 많죠. 그럼 진료 보기 어려워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확인해야 하는데 소통이 쉽지 않으니까요. 그럼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해요. 보디랭귀지를 쓰기도 하고 종이를 꺼내 필담을 하기도 하죠. 구글 번역기도 그중 하나예요. 예상 가능한 모든 것을 번역기를 이용해 물어보고 환자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안 그러기도 해요. 그걸 통해 유추하죠. 환자가 왜 이런 증상을 보이는지, 원인이 뭔지. 저의 의료적 지식과 의사소통을 해서 얻은 정보를 합쳐야 해요. 그래서 의사소통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H는 어렸을 때부터 수화언어와 음성언어를 오가며 통역했던 나의 경험과 능력이 의사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고 했다. 문화 충격이었다. 의사의 필수조건이 ‘전교 1등’이 아니라 의사소통 능력이라고?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의사’는 무엇이었나. 전교 1등 학생이 의사가 되고 사회의 상류층이 되고 그에 걸맞은 지위와 권위, 권력을 갖는다고 왜 당연하게 생각했던 걸까. H는 노숙자 등의 사회취약계층을 돌보는 의료 자원봉사를 할 때도 의사소통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나는 H를 만날 때면 종종 몸에 대해 물었다. 그는 눈을 마주치며 성심껏 답했고 자세한 건 주치의를 만나 확인하도록 했다. 네덜란드 의료 체계는 가족의 건강 기록을 담당하는 주치의가 1차 진료를 보고 필요하다면 소견서를 통해 상급 의료기관에서 진찰받도록 되어 있다. 유학생을 포함해 모든 사람에게 주치의가 있다. 언제든지 몸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주치의를 둔다는 것, 말 그대로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시간을 충분히 들여 몸과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의사, 의료적 지식을 환자 수준에 맞춰 전달할 수 있는 의사. 그것이 의사의 첫번째 덕목이자 자질이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독일 집권당이 의대 입학 정원 50% 확대를 추진했다. 매년 의대 졸업생의 10%가 지방에서 일하도록 하는 ‘농촌지역 의사 할당제도’도 주마다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팬데믹 이후의 일이다. 2020년 한국 의사 국가시험에는 정책에 반발하며 시험 응시를 거부하는 집단행동으로 약 14%의 의대생만이 응시했다. 여기서 묻는다. 우리는 의사가 무엇인지, 좋은 의사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 물은 적이 있는가. 좋은 의사란 무엇인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1.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2.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3.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4.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설] 5.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