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 ㅣ 사회학자
베트남행 하늘길이 다시 열린다고 한다. 정기 항로를 일부 재개하고, 입국제한 조치도 완화한다는 것.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방문 중 나온 성과라는 보도다. 강 장관이 코로나19 이후 베트남을 찾은 첫 외국 고위인사라고도 한다. 베트남은 코로나에 가장 폐쇄적으로 대처한 나라에 속한다. 지난 2월 말, 코로나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던 한국발 항공기의 착륙을 불허하기도 했다. 회항 사태에 ‘베트남의 배신’이라며 여론이 분노했다. “안 그래도 건방지던” 베트남에 대한 응징의 목소리가 드높았었다. 이제 상황이 조금은 풀리나 보다. 이참에 옛일들을 되살리며 마음에 새겨본다.
신해혁명 발발 직후인 1911년 중국의 어느 항구도시, 베트남의 망국지사 응우옌트엉히엔이 민씨 성을 가진 조선인을 만났다. 역시 망국의 한을 품은 망명객이었다. 이국에서 동병상련, 둘은 동무가 되었고 밤새워 서러운 한을 나눴다. 훗날 응우옌이 그 불면의 이야기들을 <상해누담>으로 펴냈다.
조선인 민이 응우옌에게 묻는다. 프랑스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부유하고 문명화된 나라이니 아무래도 일본보다는 해악질이 덜하지 않겠느냐고. 응우옌이 대답하되, “우리 나라의 비극은 당신의 나라, 조선의 비극과 다르지 않습니다. 프랑스가 원하는 바는 미국의 인디언이 갔던 길을 우리가 똑같이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가혹했다. 땅을 뺏고 턱없이 높은 세금을 매겼다. 매년 인두세를 부과하고 납부 영수증을 늘 휴대하게 했다. 영수증이 없으면 투옥하고 인두세 두배를 물렸다. 용무가 있어 도시에 나왔다가 3일이 넘으면 세금, 집과 토지는 물론 가재도구에도 세금, 심지어 개와 대소변에도 세금을 매겼다. 소와 물소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았는데, 그건 목축이 프랑스 사기업의 독점 사업인 탓이었다. 대신 소가 있는 집은 그 프랑스 회사에 보험료를 내게 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즉결 처형됐고, 더 많은 이들이 연좌제로 희생됐다. 일제의 조선통치 못지않았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셋으로 분할 통치했다. 북부는 통킹 보호령, 남부는 코친차이나 식민지, 중부는 보호국 안남왕국이었다. 응우옌은 안남에서 과거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했지만, 껍데기만 남은 왕조의 벼슬아치 노릇을 못 견뎠다. 1905년, 관직을 버리고 일본으로 가서 베트남 독립운동의 지도자 판보이쩌우와 함께했다. 일본이 프랑스의 압력으로 이들을 추방하자 중국으로 옮겼다. 베트남광복회를 조직해서 독립운동에 힘쓰던 차에 조선인 동무를 만났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질서가 무너지던 무렵, 한국과 베트남 사이 마음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다. 한국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는 창간호(1883년 10월31일)부터 베트남의 보호조약 체결을 전문까지 게재하며 비중 있게 보도했다. 2호는 흑기군이 프랑스군을 일시적으로 패배시킨 꺼우저이 전투를 다뤘고, 3호는 이 전투의 승인을 분석했다. 베트남은 주요 뉴스였다.
베트남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1906년, 판보이쩌우와 량치차오의 대담을 담은 <월남망국사>가 소개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베트남 망국의 과정과 실상, 원인과 전망을 짚었으니, 식민지로 전락해가던 한국인의 관심이 비상했다. 여러 판본으로 번역됐고, 주시경은 순한글로 번역했다. 급기야 1909년, 통감부가 금서로 묶었지만 일제 말까지 널리 읽혔다. 판보이쩌우는 일본에 머물던 1907~1908년 무렵, 베트남인, 조선인, 중국인, 인도인, 필리핀인, 그리고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동아동맹회를 결성했다. 안중근의 거사에 감동하여 1912년 코친차이나 총독 암살을 결행하기도 했다. 함께 평등한 아시아를 꿈꿨다.
한국인은 역사 속에서 평등한 대외 관계를 별로 경험하지 못했다. 전통시대는 물론 근대 이후에도 대개 강자와의 수직 관계를 강요받았다. 지금도 ‘트(럼프)황상’이 난리다. 그래서일까, 내 밑에 누가 있어서 시원스레 응징하며 이 오랜 치욕을 풀고 싶은 욕망이 불현듯 불끈대곤 한다. 그들의 ‘배신’과 ‘건방짐’은 좋은 명분이 된다. 일본 우익이 한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내 속에 바로 그 욕망이 있다. 오랜 수직의 역사 속에서 한국과 베트남은 드물게도 수평의 관계를 맺으며 서로 돕고 아픔을 나눈 나라다. 한국이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 책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시 열린 하늘길이 수평의 비행이 되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