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안철수의 ‘중도’는 왜 ‘보수’로 기울어지나

등록 2020-09-21 18:12수정 2020-09-22 02:37

박찬수의 ‘진보를 찾아서’ _06
2011년 9월7일 경북 구미 금오공과대학에서 열린 ‘청춘콘서트’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강연하고 있다. 정치 입문 전의 안철수 원장은 청춘콘서트를 통해 새로운 진보적 흐름을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는 ‘중도실용’의 정치실험을 거쳐, 보수 본류에 합류하는 기로에 서 있다. 류우종 기자
2011년 9월7일 경북 구미 금오공과대학에서 열린 ‘청춘콘서트’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강연하고 있다. 정치 입문 전의 안철수 원장은 청춘콘서트를 통해 새로운 진보적 흐름을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는 ‘중도실용’의 정치실험을 거쳐, 보수 본류에 합류하는 기로에 서 있다. 류우종 기자

‘중도’를 향한 기대와 열망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나 강하다. 중도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고질적인 갈등을 뛰어넘어 다수의 이익을 대변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것은 환상에 가깝다. ‘양보와 타협’이라는 멋진 말로 포장된 ‘합의’란 대개 중간 지점의 타협이 아니라, 실제로는 ‘진보적 합의’ 또는 ‘보수적 합의’를 의미하는 게 현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국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의 주관적 이념성향을 살펴보는 여론조사가 신문·방송에 자주 등장했다. 유권자 성향을 ‘진보, 보수, 중도’의 세 범주로 분류했는데, 다가올 선거에서 어느 정당이 유리한지 예측하는 지표로 활용됐다. ‘진보’ 비율이 전보다 늘었으면 민주당계가, ‘보수’ 유권자 비율이 증가했다면 국민의힘과 같은 보수 정당이 유리할 거란 추론이다. 전체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중도 유권자의 표심이 중요하다고 늘 언론에선 얘기한다. 결국 선거는 누가 중도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말 ‘중도’는 실체가 있고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인 걸까. 더불어민주당은 2020년 4월 총선까지 최근 네차례의 전국 선거를 모두 이겼다. 전례 없는 이런 승리는 중도 유권자의 이동으로 이뤄진 것인가, 아니면 전반적인 정치지형의 진보화를 통해 이뤄진 것인가. 만약 유권자의 주관적 이념 평가에서처럼 ‘진보-보수-중도’가 대략 삼분되고 중도 표심이 선거 때마다 진보 또는 보수로 이동한다면, 중도를 겨냥한 전략을 쓰는 게 선거 승리엔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역대 주요 선거 사례를 살펴보면, 승패를 가르는 핵심은 중도 표를 누가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진보 또는 보수 유권자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동원해낼 수 있느냐에 달린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게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2007년의 17대 대통령선거다. 이 선거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48.7%를 득표해, 26.1%를 얻은 정동영 통합민주당 후보를 거의 더블스코어 차이(22.6%포인트)로 이겼다. 표수로는 530여만표 차였다.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제대로 된 견제세력이 없던 이승만 대통령 시절을 제외하곤, 역대 대선에서 나타난 가장 큰 표차의 승리다. 부정·불법이 일상이던 군사정권 시절의 1967년 대선 때도 박정희 공화당 후보(51.4%)는 윤보선 민주당 후보(40.9%)를 겨우 10.5%포인트 차로 이겼을 뿐이다.

530만표라는 표차는 이명박 후보의 선전 때문이라기보다, 정동영 후보의 부진에 기인한 바 컸다. 정동영 후보가 얻은 표는 617만표에 그쳤다. 5년 전인 2002년 노무현 후보 득표(1201만표)나 5년 후인 2012년 문재인 후보 득표(1469만표)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명박 후보의 압승은 보수의 확장(중도의 포섭)에 따른 승리가 아니라, 진보 성향 유권자의 대거 불참에 따른 반사적 승리란 뜻이다. 2007년 17대 대선을 전후해 한나라당이 세차례나 전국 선거를 휩쓸며 행정부와 국회를 장악했지만, 보수 장기집권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몰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도’를 향한 기대와 열망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나 강하다. 중도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고질적인 갈등을 뛰어넘어 다수의 이익을 대변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것은 환상에 가깝다. ‘양보와 타협’이라는 멋진 말로 포장된 ‘합의’란 대개 중간 지점의 타협이 아니라, 실제로는 ‘진보적 합의’ 또는 ‘보수적 합의’를 의미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풍요롭고 정치적 갈등이 적었다고 평가되는 1950년대가 사실은 루스벨트의 뉴딜 개혁에 기반한 ‘리버럴 가치에 대한 합의’의 시대였다는 건 상징적이다.

정치에서 ‘타협과 합의’는 이념적 지향을 배제하고 이뤄질 수가 없다. 중요한 건, 진보적 가치에 대한 합의든 또는 보수 가치의 합의든, 포용과 관용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이명박·박근혜 시대엔 최소한의 관용과 다양성의 인정이 사라졌기에 ‘탄핵’이라는 정치적 대격변을 불러왔다고 말할 수 있다.

진보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또 더 균등한 분배를 위해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반면 보수는 정부 개입을 가능한 한 줄이고 시장에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는 쪽이다. 이렇듯 진보-보수의 차이는 국가의 역할 차이에서 비롯한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의 미래>에서 말했다. 중도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진보-보수의 이런 차이에서 기인한다. 정부 역할이나 시장 역할만으로는 지금의 복잡한 문제들을 풀기 어려우니, 중간에 서면 둘의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중도 정치세력의 추구로 나타난다.

미국 싱크탱크 니스캐넌센터는 2018년 ‘중도는 존립할 수 있다’는 보고서에서 이런 열망을 옹호하며 “우리는 ‘큰 정부’와 ‘작은 정부’라는 잘못된 이분법을 거부하고, 시장 친화적인 우파와 정부 친화적인 좌파의 가장 좋은 측면을 결합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보고서의 제목 ‘중도는 존립할 수 있다’(The center can hold)는 몇해 전 <뉴욕 타임스>에 실린 ‘중도는 존립할 수 없다’(The center cannot hold)는 칼럼 제목을 패러디한 것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극단주의가 그토록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는 ‘중도’에 거는 기대가 사그라들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지난 40년간 민주당 전당대회 스타였던 빌 클린턴의 연설은 4분에 불과했고 그나마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프라임타임 전에 끝나버렸다. 클린턴은 1990년대에 민주당 노선의 중도화를 내세우며 대통령 연임에 성공했던 민주당의 스타였다.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2008년 전당대회에선 무려 48분간 ‘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를 역설해 ‘오바마보다 더 오바마다운 연설’이란 평을 들었다. 그러나 올해 전당대회에서 클린턴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끈 건 진보 색채가 매우 강한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었다. <시비에스>(CBS)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원의 56%가 클린턴의 연설을 듣기를 원했지만, 그보다 많은 63%는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연설을 원한다고 답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것을 “민주당이 왼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평했다. 사실 클린턴의 ‘중도 노선’은 레이건의 보수주의가 강력하던 시절에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이었다.

한국 정치에서도 ‘중도’를 표방한 세력이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례를 찾긴 힘들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철승씨의 중도통합론처럼, 중도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독재에 협력하는 야합(‘사쿠라’)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나마 현실정치에서 ‘중도’의 가능성이 열린 건 1987년 민주화 이후, 좀더 가깝게는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일 것이다. 가장 최근의 주목할 만한 중도 실험으로는, 성공적인 벤처사업가 이력을 뒤로하고 정치에 뛰어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있다. 안 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제3당인 국민의당을 이끌고 정당투표에서 26.74%, 의석수로는 38석을 얻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안 대표의 약진은 전통적 민주당 지지기반이던 호남 및 수도권에서의 선전에 힘입은 바 컸다. 진보 성향 유권자들이 더불어민주당의 대체재로 안 대표를 선택한 측면이 강했다는 얘기다.

2012년 정치 입문 직전에 펴낸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에서 그는 정치를 하려는 이유를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기억’에서 찾았다. “그렇게 무력한 사람들은 사회가 돌봐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고 참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많이 고민했다”는 안 대표의 생각이 진보 성향 유권자를 끌어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보의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매김했을 때, 안철수의 정치적 효용은 극대화했다. 반면에 2018년 2월 새누리당 탈당파와 손잡고 진보-보수를 뛰어넘는 ‘제3세력’을 추구하면서 그의 정치적 자산은 급속히 소실되기 시작했다.

최근 안철수 대표는 보수 본류 쪽으로 적극 다가서는 모양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이고, 국민의힘(옛 미래통합당) 국회의원들과는 교류 폭을 넓히고 있다. 안 대표는 11일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이 주최한 청년정책 비대면 간담회에 참석해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나란히 축사를 했다. 23일엔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를 맡은 미래혁신포럼에서 ‘야권 혁신’을 주제로 강연한다. 내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내후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통합이든 연대든 안 대표로선 보수 색깔을 좀더 분명히 하는 것 외엔 달리 길이 없어 보인다. ‘진보’에서 출발해 ‘보수’ 합류를 눈앞에 둔 안 대표의 행로는 ‘중도 실험’의 무망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듯싶다.

박찬수 ㅣ 선임논설위원.  <한겨레신문>에서 정치부와 사회부·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국회와 청와대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과 1986년 태동한 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를 펴냈다. pc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대통령 기자회견’ 이번에도 이러면 망한다 1.

‘대통령 기자회견’ 이번에도 이러면 망한다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유레카] 2.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유레카]

북-러 결탁 전, 러시아는 윤석열에게 경고했었다 [논썰] 3.

북-러 결탁 전, 러시아는 윤석열에게 경고했었다 [논썰]

대통령 거짓말에 놀라지 않는 나라가 됐다 [권태호 칼럼] 4.

대통령 거짓말에 놀라지 않는 나라가 됐다 [권태호 칼럼]

“전쟁이 온다” [신영전 칼럼] 5.

“전쟁이 온다” [신영전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