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복경 ㅣ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최근 한국 사회는 기업과 사회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 나가는 중대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있다. 사건 하나하나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깊은 뿌리로부터 자라난 그 사건들은, 긴 시간 굽어진 뿌리를 펴려던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쌓인 나이테이기도 하다. 사건의 한 당사자는 대기업이고, 다른 한 당사자는 한국 사회 전체다. 그 기업의 주식을 가진 주주들과 그 기업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되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노동자들, 또 그 기업에 하청·재하청을 얻어 기업을 유지해가야 하는 중소기업들과 그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을 구매하며 살아가는 소비자들로 구성된 한국 사회 그 자체.
최근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공정경제 3법’에 동의하면서 국회 입법에 청신호가 켜졌다. 8월31일 정부가 국회에 제출해놓은 ‘상법’ 개정안, 금융그룹의 감독에 관한 법률 제정안,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주주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20대 국회에도 제출되었던 법안이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추진되었던 내용이다.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을 뿐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니, 새로 검토하느라 시간을 끌 일도 아니다. 전경련 부회장, 대한상의 회장, 경총 회장님들이 어제오늘 줄줄이 국회를 찾는다고 한다. 전경련의 회장은 지에스(GS)건설 회장이고, 경총 회장은 씨제이(CJ) 대표이사고, 대한상의 회장은 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재벌 대기업의 대표자들이다. 지금까지 이 기업 경영진은 관련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는 데 강력한 바리케이드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제는 한국 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해 전향적인 접근을 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건은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 대한 검찰의 기소다. 온갖 우여곡절을 거쳐 9월1일 검찰이 이재용 부회장을 기소했는데, 공소장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삼성그룹 총수 일가의 승계 과정이 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20년도 넘었고, 기소와 재판 역사도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검찰의 공소장이 의미를 갖는 것은, 총수 일가가 턱도 없는 지분으로 기업집단을 지배하기 위해 다차원적인 불법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그 범위와 규모가 중대범죄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검찰이 적시한 이재용 부회장 쪽의 위법행위들은 해당 기업과 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힌 범죄행위이기도 하지만, 유사모방범죄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앞으로 법원의 판단은, 이제 재벌 대기업 총수도 한국 사회의 법과 질서의 예외 지역에 있지 않다는 점을 확인해주는 가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9월22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국회 입법 청원이 10만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 심의에 넘겨졌다. 우리는 ‘김용균법’이 만들어질 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기업들의 무책임한 행태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산재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매일 들리고 보인다. 이미 기업들이 스스로 알아서 할 기회는 지치도록 주어졌다. 이제는 해당 기업들도 규칙 변경에 동의하는 것이 공동체에 대한 예의다. 집권당 대표가 지난 17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관련 법 제정을 공언했으니 이제는 진척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우리는 지금 기후위기와 전염병, 미-중 갈등과 국제질서 변화, 산업구조 변동으로 모든 이의 삶이 불확실성의 세계에 내던져진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한국 사회가 합심해 이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사회와 기업의 새로운 계약이 절실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온갖 ‘뉴딜’이 논의되고 있지만, 가장 선행해야 할 새 계약은 이것이다. 새로운 계약은 생명과 안전, 인간의 존엄을 우선하는 시장원리에 토대를 둬야 한다. 국회가 입법으로 새로운 계약을 제도화하고, 법원이 새로운 계약원리에 맞는 판결로 기준을 세우는 일이 더 이상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