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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거짓 프레임에 맞서는 방법

등록 2020-09-24 15:07수정 2020-09-25 09:10

한채윤 ㅣ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2012년도의 일이다. 캐나다 보수당 소속의 정치인들은 갑자기 제1야당인 신민주당이 탄소세를 지지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명백한 거짓 주장이었다. 하지만 신민주당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탄소세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부인할수록 신민주당과 탄소세가 나란히 언급되는 일만 더 잦아져 유권자들에겐 ‘신민주당=탄소세’라는 공식이 강화되었다. 이를 ‘탈진실(post truth) 정치전략’이라고 한다. 거짓말이어도 계속 반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같은 2012년의 미국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릭 샌토럼은 네덜란드 노인들은 원치 않는 죽임을 당할까봐 ‘나를 안락사시키지 말라’는 메시지가 적힌 팔찌를 차고 다닌다는 주장을 펼쳤다. 오바마의 의료보험 정책을 공격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네덜란드 기자가 직접 반박했지만 샌토럼은 사과도, 철회도 하지 않았다. 샌토럼이 자기 ‘가슴속에 있는 바를 말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였다. 가짜뉴스를 만들어서 퍼트리는 이들이 들통이 나도 당당한 이유다. 이 두 사례는 <계몽주의 2.0>에 나오는데, 저자인 조지프 히스는 우파가 이런 탈진실 전략을 잘 활용하는 것에 비해 좌파는 대응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을 딱히 좌파라 하긴 어렵지만 대응을 못 하는 것만큼은 닮았으니 말이다.

2017년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회의 한 장면이다. 당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동성애에 반대하십니까”라고 질문했다. 찬반 문제가 아니라고 받아쳐야 했는데 그만 순순히 “반대한다”고 답해버린다. 이어 ‘왜 민주당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느냐’ 묻자 또 ‘차별에 반대한다’는 원론적인 답을 한다. 함정에 빠졌다. 홍준표 후보는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옹호법인데 아까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재차 거세게 추궁했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정작 혐오 발언과 거짓 주장을 한 건 홍준표 후보였지만 며칠 뒤 발언을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한 건 문재인 후보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민주당은 계속 동성애자를 위해 차별금지법을 만든다는 의심에 시달리고 이를 부정하는 과정에서 인권침해 발언을 하고 그래서 다시 사과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차라리 그때 ‘우리나라 국민들의 대다수는 이성애자이고,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지면 이성애자들이 훨씬 큰 혜택을 보게 되니 이성애자 옹호법입니다. 이런 차별금지법을 홍준표 후보는 반대하십니까’라고 되물었다면 어땠을까?

차별은 절도나 살인과 같이 형법에 명시된 범죄가 아니기에 별도의 법을 만들지 않으면 차별 행위를 규제하기도, 피해자를 구제하기도 어렵다. 평생 단 한번도 차별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외모나 연령, 결혼 여부나 장애 등 차별은 만연해 있다. 차별은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지만, 부당한 해고나 취업상 불이익으로 생계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당연히 차별금지법은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법안이 처음 발의된 뒤 13년이 넘도록 만들어지지 않는 건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 교회가 탄압받고, 목사님이 잡혀가고, 동성애가 확산되어 결국 나라가 망한다’는 유언비어에 갇혔기 때문이다. 이 허황된 프레임조차 깰 능력이 지금 민주당에는 없다.

대응 방법은 프레임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조지프 히스가 책에서 제시한 해법대로 대응하는 곳이 있다. 바로 서울퀴어문화축제다. 알몸음란축제라고 거짓 프레임을 씌울 때, 이를 부정하기 위해서 정장을 차려입고 얌전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지 않았다. 축제는 누구나 자기답게, 자유롭게,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는 메시지를 표현하는 데 더욱 집중했고, 이것이 50명으로 시작한 축제가 20년 만에 10만명이 넘게 찾는 축제가 된 비결이다. 올해의 축제는 온라인으로 개최 중이다. 오는 29일까지 누리집을 방문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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