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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희진의 융합] 동문서답의 정치

등록 2020-09-29 04:59수정 2020-09-29 10:12

정희진의 융합 _07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모든 언설에는 전제가 있다. 저절로 생겨난 말은 없다. 그러나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사회적 약자는 참여하지 못한다.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지 말라.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기존 지식을 자기 관점에서 대응한다. ‘답정너’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동문서답은 소통이 안 되는 상태를 일컫지만, 사실, 인생은 동문서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문에는 서답이 정답이다.

‘여성학 강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나의 많은(?) 직업 중 하나이다. 여성주의도 나의 부분적 가치관이다. 하지만 나를 ‘여성주의를 온몸에 뒤집어쓴 존재’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여성학 강사는 위험한 직군일 뿐이다. 내용의 특성상, 신체적으로 정치적으로 고된 직업이다.

지난 25년 동안 대학, 시민사회, 노동조합, 여성주의 모임, 기업 등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하면서 내가 겪은 사연에 해석을 더하면, 책 몇 권이 나올 것이다. 대개 경험한 나조차 믿을 수 없는 희비극들이다. 심호흡으로 분노를 조절한 후, 간단히 말하면, 모욕과 호기심이 주를 이룬다. 화학, 법학 같은 주제와 달리 말하는 사람이 여성이고 강의 내용이 페미니즘일 때, 세상에 없었던 일이 발생한다.

강의 후에는 나의 현장 대처 능력에 대해 늘 우울과 자책이 따른다. 여성주의는 장애, 인종, 계급, 지역 등의 이슈와 다르다. 이런 주제들은 조롱이나 극렬한 반대 의견을 주장하지 않는다. 어쨌든 겉으로는 말을 삼가는 경향이 있다. 젠더 이슈는 그렇지 않다. 의도적으로 혹은 무지의 권력으로 무례를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매복’을 대비해 여유와 각성을 동시에 장착한 몸으로 강의에 임한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모르므로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이 체화되어 있어야 한다. 대화든 강의든 상대방이 말하면, 1초 안에 ‘우아하고 지적으로 그러나 통쾌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재작년 정치학자 김영민이 쓴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나도 한참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조감이 들었다. 나로서는 명절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글은 질문하는 사람(부모, 당숙, 친척 등)이,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에게 확인하는 비윤리성을 지적했다. 윤리와 권력관계는 동일한 주제다. 나의 경우는 권력관계가 좀 더 적나라하다. 아래 대화는 내가 타인을 만나자마자 생긴 일을 3초 안에 처리한 사례이다. 지인의 권유로 ‘수위’가 높은 내용, 내가 당한 처참한 사례는 삭제했다.

동문서답의 힘

성희롱 예방 교육 수강 남성 공무원: “선생님은 성(性)을 가르치니까 남편하고 잠자리가 끝내주겠네요!” 나: “아뇨, 저는 엄마랑 자는데요. 편찮으셔서요.”

글쓰기 수업 수강 남학생: “선생님, 여성학이 설마 인문학은 아니겠지요?” 나: “그럼요! 여성학은 인문학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학생 경영학과 맞지요?” 학생: “앗, 어떻게 아셨어요?”

나: “성경은 일종의 담론이죠. 코란을 비롯 수많은 외전(外傳)이 그 증거죠.” 여학생: “선생님은 지금 특정 종교를 모욕하셨습니다. 사과를 요구합니다.” 나: “좋은 의견이에요. 하지만 학과 선생님께 먼저 여쭤보고 오세요.”

남학생: “저는 정말, 왜 여학생들까지 취업 준비에 열성인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걔네들은 시집가면 되잖아요?” 나: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한) 학생처럼 남자들이 취직을 못 하고 있으니, 무직자와 무작정 결혼은 무리가 아닐까요?”

유명 오피니언 리더: “(웃으면서) 저는 언제나 그게(성기) 딱딱해서 문제입니다. 이런 교육 안 받아도 됩니다.” 나: “정말 그러시다면, 엄청 아프실 텐데…. 그곳이 굳은 것은 뇌의 작용이니 뇌를 이완하세요.”(명백한 성희롱 범죄였지만, 이런 문제를 매일 신고하다가는 나는 글 대신 고소장 쓰기로 인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채소를 파는 청년: “이모, 오늘 물건 좋아요. 얼른 오세요.” 나: “제가 당신 같은 조카를 뒀으면, 열 살에 애를 낳았다는 건데, 지나가는 시민을 성역할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인권 침해입니다.”(물론 매번 이렇게 대응하지는 않는다.)

허름한 내 차림새를 보고 백화점 식품 매장 직원: “어떻게 오셨어요?” 나: “전철 타고 왔는데요.” 직원: “아니… 어떻게(왜) 오셨냐니까요(나가주세요)!” 나: “(빠른 영어로) 데리(낙농제품) 파트가? 프랑스산 에멘탈 치즈 포션으로 파나요?”(내가 규범적인 옷차림을 한 여성이었다면,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몇 개의 영어 문장을 외워두고 동문서답용으로 사용한다.)

나의 실력을 떠보려는 남학생이 개강 첫날 갑자기: “강사님, 알튀세르와 푸코의 차이를 설명해주시겠어요?” 나: “일단, 강사는 지칭이고요. 호칭을 사용하세요. “선생님”이나 “희진아”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알튀세르와 푸코는 모두 언어의 물질성에 천착했지요. 누가 더 ‘유물론적’이었지요? 답해주시면, 제가 더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남자 교수: “선생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양성평등이 무슨 말이지 모르겠습디다. ‘한방에’ 설명 좀 해주시죠.” 나: “선생님도 양성에 포함되잖아요? 그러니, 제게 좀 알려주시겠어요?”

남성 시민운동가: “한국 향락산업이 심각하죠. (격려조로) 여성학자인 선생님께서 하실 일이 많습니다.” 나: “아니, 그걸 왜 제가? 저는 그런 데 안 가는데요. 선생님이 다른 남성을 설득하셔야죠.”

남자 교수: “여성학자가 왜 국방 정책에? 여군 문제나 군대 내 성폭력이 있잖아요? 그런 글을 쓰세요.” 나: “소크라테스는 동성애자였어요!”(나의 동문서답)

남성 지식인: “요즘 하도 맨스플레인이라니까.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검열이 걸려서.”(자신이 억압받고 있다고 호소하는 남성) 나: “예, 선생님, 공감합니다. 인간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배워야지요. 남성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근데 진짜 문제는 배움을 주는 남성이 없어요. 아, 그리고 이건 셰익스피어가 한 말인데요, 과묵한 남자는, 그냥 아는 게 없어서 그런 거래요.”

남성 회사원: “성매매방지법은 인권 침해입니다. 성욕은 본능이에요.” 나: “아, 그런가요. 그러면, 남성이 성을 팔면 되겠네요. 돈도 벌고 성욕도 해결하고요!”

말의 전제를 생각한다

어머니가 딸에게 “얘야, 남자는 울타리란다”라고 말하면, ‘요즘 딸’은 이렇게 말한다. “응, 나도 알아. 그래서 울타리를 최대한 많이 둘 생각이야.” 내게 “선생님은 여성학자 같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이 말이 좋은 의미인지 그렇지 않은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성학에 대한 편견이 전제된 말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예, 맞습니다. 원래 제 전공은 핵물리학이에요.” 전자는 재해석이요, 후자는 동문서답이다.

동문서답은 소통이 안 되는 상태를 일컫는 대명사지만 사실, 인생은 동문서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동문에는 서답이 정답이다. 길 안내나 모르는 것을 묻는 학생의 질문 등 목적이 분명한 간단한 소통 외에는, 거의 모든 영역의 대화는 참여자의 생각을 바꾸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미 정해진 각본(통념)이 있거나 ‘사이다 발언’으로 상대방을 이기려는 데 목적이 있다. 논리도 상식도 없는 스트레스 해소를 논쟁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모든 언설에는 전제가 있다. ‘8시간 노동제’는 가정에서 누군가가 가사노동과 육아에 종사할 때만 가능한 사회 시스템이다. 한국이 ‘동아시아’인 이유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삼은 근대의 역사적 산물이다. 정치적 과정에 대한 이해 없는 지식은 페이크 뉴스에 불과하다.

저절로 생긴 말은 없다. 말은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사회적 약자는 참여하지 못한다. 애초부터 백인 남성 외의 이들은 선제(先除, foreclosure)되었다. 지동설부터 여성주의까지,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려고 하면, 백전백패다.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기존 지식을 자기 관점에서 대응한다. ‘답정너’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사족: 간혹 내게 글쓰기 ‘비법’을 물어보는 이들이 있다. 나는 답한다. “비법은 없고 현상은 있습니다. 야간에 배달음식을 폭식하고 두개골에 골다공증이 생기고 코에서 녹색 피가 흐릅니다. 쓴 글을 모니터로 열 번쯤 다듬은 다음 소리 내서 읽고, 인쇄해서 읽고, 이틀 후에 또 읽습니다. 그래도 오자가 나오고 글은 창피합니다. 제 풀에 지쳐서 토할 때 즈음, 쓴 글을 폐기하거나 눈을 딱 감고 뻔뻔하게 송고합니다.” 이건 동문서답이 아니라 우문우답이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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