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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주호영 식이라면 전쟁에 진다 / 김종대

등록 2020-10-08 14:25수정 2020-10-09 10:07

김종대 ㅣ 정의당 한반도평화본부장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국가 기밀을 거침없이 말하는 장면은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그는 연평도에서 실종된 우리 공무원에 대해 북한군 상부로부터 “연유를 바르고 태우라”, “762(7.62밀리 소총)로 사살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군 특수정보를 연이어 공개했다. 이에 비난이 고조되자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762 같은 경우는 이미 제가 발언하기 전에 언론에 보도가 됐고,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이 이틀 전에 페이스북에도 올렸고 또 그 뒤에 확인하니 청와대가 기자들에게 브리핑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주 원내대표가 발언하기 이전의 언론 보도는 정부의 항의로 주 대표 발언 이전에 삭제된 기사다. 한기호 의원의 9월30일자 페이스북에는 ‘762’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인지 설명이 없다. 청와대가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했다는 주장 역시 알쏭달쏭하다. 주 원내대표 주장대로 청와대가 누설한 게 사실이라면 곧바로 누설한 자를 인사 조치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주 원내대표는 자신이 수집한 군 기밀이 여기저기 흘러 다닌 정보라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군 상부가 지시한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사살’, ‘762’와 같은 단어를 공개한 것이 왜 중요하냐고 호통치는 국민의힘 관계자들도 눈에 띈다. 군 기밀이 뭔지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연평도 부근의 북한 함정에 탑승한 전투원들은 보통 ‘88식 보총’이라고 불리는 5.45밀리 탄환을 사용하는 AK-74로 무장한다. 그런데 굳이 ‘762로 하라’는 뜻은 파괴력이 우수하거나 저격용으로 쓰이는 총기를 사용하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사실이라면 매우 민감하고 심각한 대목이다. 아마도 우리 군 당국이 국회 국방위원들에게 비공개회의에서 북한의 사살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라는 근거로 제시했을 법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나온 전후 맥락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으로만 이해해야지 이것을 상부의 결정적인 사살 명령 증거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2002년에 정보사령관이던 한철용 소장은 단편적인 감청 첩보를 바탕으로 그해 6월에 북한의 서해 도발 징후가 있었다는 주장을 남발했지만 결국 그 주장은 법정에서 패소했다. 상부의 개입 여부는 여러 출처의 정보를 바탕으로 종합적인 분석과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고차원적인 영역에 있다. 그러나 감청 내용 중 일부가 공개되면 북한은 자신들의 어떤 통신이 감청되는지를 깨닫게 되고 곧바로 우리의 정보전에 대항한 대정보전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특수정보는 상대방에 대한 명분과 실력에서 우위를 달성하게 하는 중요한 군사기밀이다. 한기호 의원은 육군에서 정보작전부장과 군단장까지 역임한 인물이고 주호영 원내대표는 국회 국방위원과 정보위원장까지 지냈다. 안보의 이익을 지키는 사람들의 자세라고 볼 수 없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출판된 처칠 회고록이 독일군의 암호해독 과정을 기술하였기에 2차 세계대전 때 더욱 강화된 독일군 암호체계 ‘에니그마’가 출현했다. 처칠의 뼈아픈 실수였다. 이때 영국 정보부(MI6)에서 천재적인 수학자 앨런 튜링이 독일군 암호를 풀지 못했다면 영국은 대서양에서 독일을 이길 수 없었다. 튜링은 일기예보를 규칙적으로 전송하는 독일군의 사소한 실수에서 해독의 비밀을 찾아냈다. 실패와 실수 위에 세워진 처칠의 성공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 정부는 모든 암호해독기와 서류를 소각하여 정보전쟁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뛰어난 전쟁의 지도자는 상대방이 전쟁에서 왜 졌는지를 모르게 하는 존재여야 한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대에 끌려갈 때까지 독일의 전범들은 자신들의 암호가 해독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 진실이 가려짐으로써 얻어지는 평화, 사소한 날씨 단어 몇 개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설, 그게 바로 전쟁이다.

만일 국민의힘이 안보정당을 지향한다면 청와대와 국방부의 무분별한 정보공개를 질타하고 견제했어야 했다. 9월24일에 마치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것처럼 경솔하게 사실을 확정하고 정보를 공개했다가 지금에 와서 다시 주워 담기에 바쁜 군 당국을 합리적으로 비판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처칠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호영 원내대표는 그 반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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