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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석준의 그래도 진보정치] 그린 뉴딜에 빠진 ‘루카스 플랜’ 정신

등록 2020-10-08 14:27수정 2020-10-09 02:41

장석준 ㅣ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지난달 4일 영국의 공학자 마이크 쿨리가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쿨리가 참여했던 독특한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언급하면, 혹시 아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바로 루카스 플랜이다.

지금은 해체됐지만 1970년대만 해도 루카스 에어로스페이스는 비행기 부품, 자동차 엔진 등을 생산하는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제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경영난에 부딪혔고, 당시 대다수 기업이 그랬듯이 루카스 역시 대량 감원에서 해법을 찾았다. 1974년에 루카스 경영진은 대규모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했다.

루카스의 여러 계열사 노동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노동자들은 열띤 논의 끝에 대안 생산 계획을 짜기로 결의했다. 고용 유지 요구가 광범한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루카스가 새로운 제품들을 개발해 경영을 개선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대안을 찾는 데 회의적인 경영진에 맞서 노동자들은 직접 신제품 기획과 개발에 나섰다. 이런 결정을 주도한 이들 가운데에 기술직 사원이면서 노동조합 활동가이던 쿨리도 있었다.

루카스에는 쿨리 같은 공학도 출신 사원이 많았고, 이들 사이에 노동조합 활동도 활발했다. 그렇다고 기술직 사원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쿨리가 주도한 위원회는 1년간 회사 내 각 공장 노동자들의 의견을 모으고 아이디어를 다듬었다. 이를 바탕으로 1976년 1월에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을 위한 루카스 노동자들의 계획’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것이 이른바 ‘루카스 플랜’이다.

루카스 노동자들은 전투기 부품 따위의 생산만 고집해서는 일자리를 지킬 수 없으며, 사회에 정말 필요한 다른 제품을 선보일 때에만 고용도 유지할 수 있다고 봤다. 노동 현장의 경험과 기술을 모으면 그런 제품을 충분히 설계할 수 있다고 믿었고, 루카스 플랜에서 이를 실제 입증했다. 루카스 노동자들이 제안한 새 생산품은 태양광과 풍력 발전 설비, 항공기 생산에 쓰이는 기술을 활용한 최첨단 의료 장비, 철도와 차도를 함께 운행할 수 있는 대중교통 차량 등이었다. 하나같이, 50여 년 뒤 세상을 미리 내다본 것 같은 품목이다.

안타깝게도 루카스 플랜은 ‘플랜’으로 그쳤다. 이 계획이 발표된 1976년에 영국은 외환위기의 수렁에 빠졌고, 1979년에는 마거릿 대처 총리의 시장지상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루카스는 감원 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했고, 마침내는 회사명 자체가 사라졌다.

그러나 쿨리는 이후에도 계속 루카스 플랜의 전도사로 나섰다. 새로운 산업혁명이나 생태 위기가 떠들썩하게 이야기될수록 이 계획의 기본 발상이 더욱더 절실히 필요해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어떻게 ‘보통’ 사람들의 힘으로 그런 계획을 짤 수 있었냐는 물음에 쿨리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그들이야말로 ‘특별한’ 사람들이었다고. 그들은 권력 사다리의 꼭대기에 있는 이들에게는 없는 지혜와 열정의 저수지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먼 옛날,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기후위기에 맞서는 계획이라며 정부가 내놓은 ‘그린 뉴딜’에 빠진 결정적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루카스 플랜이 보여준 지향과 가능성이다. 생태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 소비자, 지역사회 등이 경제 체제의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해야 하고 그럴 때에만 생태 전환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철학이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온통 독차지한 것은 재벌 대기업이다.

이제라도 방향을 다시, 제대로 잡아야 한다. 한국 사회의 탈탄소 목표와 계획 수립에 시민들이 참여해야 한다. 지역 주민들의 협동조합이 중심이 돼 재생가능에너지 설비를 구축해야 한다. 노동자 참여를 통해 생태 전환과 일자리 유지를 함께 도모하는 ‘정의로운 전환’에 착수해야 한다. 지금 그린 뉴딜에 필요한 것은 루카스 플랜 정신의 긴급 수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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