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_08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한마디로,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은 없다. 어떤 객관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흑서’의 제목이 좋았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문재인 정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순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산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한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좋은 책은 열심히 권하지만, 잘 팔리는 책은 “나까지 관심을 보탤 필요가 있나” 싶어 언급을 피하는 편이다. 하지만 소위 ‘조국 흑서’와 ‘조국 백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객관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민주주의는 어떻게 끝장나는가)>(천년의상상, 2020)와 <검찰개혁과 촛불시민(조국 사태로 본 정치검찰과 언론)>(오마이북, 2020). 전자가 흑서라 불리고, 후자는 백서라 불린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권의 ‘조화’와 그 조화의 바람직하지 않은 효과이다. 즉 이 글은 책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객관성 개념을 해체하는 방식에 대한 시도에 가깝다. 기존의 ‘객관성’은 자기 입장과 무관한 중립적, 제3자적 인식을 의미한다. 당연히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지식 분야에서 논쟁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일단 백서(白書, White Paper/청서, Blue Paper), 흑서(黑書, Black Paper), 그린 페이퍼, ‘회색 문헌’ 등의 기존 개념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낱말 풀이는 생략한다. 내 생각에 백서(白書, white paper)는 인종주의적 표현이다. 거짓 없이 낱낱이 밝히고 보고한다는 의미의 책은 꼭 ‘흰색’이어야 하나? 흑서는 백서에 대응해서 현행 정책을 비판한 문서로, 백서에 대항한다는 의미 혹은 대외비 문서를 지칭한다. 결국 흑서도 또 다른 진실을 주장하므로, 두 권 모두 지은이의 입장에서는 백서이다. 여기서부터 두 권은 같은 책이 된다. 두 개의 ‘(조국)백서’가 밝히고자 하는 진실은,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가 문재인 정부 일각의 부패 때문인가 아니면 검찰과 보수 언론의 기득권 때문인가이다. 두 책은 그동안 일어난 사건들에서 무엇이 객관이고, 사실이고, 의도(‘음모’)인가를 두고 논박한다. 나는 사건들의 진실보다 이를 주장하는 필자와 독자들의 사고방식에 관심이 있다. 객관성은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객관성은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오염된’ 개념이다. 객관성은 사회―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당사자, 여론, 사회적 조건 등―와의 관계에서만 논할 수 있는 문제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2006년 작 <유레루>(ゆれる, Sway, 흔들리다)는 형제가 연루된 살인 사건을 다룬다. 오다기리 조는 증언하는 동생이고, 가가와 데루유키는 혐의자인 형 역을 맡았다. 동생은 형의 살인을 목격했다고 확신, 증언하고 형은 살인자로 수감된다. 이후 동생은 사건 현장인 흔들거리는 다리를 먼 곳에서 ‘눈으로’ 본다. 그러고 나서 그 다리에 가서 형처럼 서본다. 현장에서 동생은 시끄러운 물소리를 ‘듣고’ 살인이 아니라 단순한 사고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작품은 진실을 판단하는 방식으로서 시각과 청각의 차이(위계)를 둘러싼 논쟁이면서, 당사자들 간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객관성에 대해 질문한다. 어떤 객관성도 관계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객관성은 태초에 지구 밖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를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들이 있었다”로 전환시켜보자. 정의 구현이 어려운 것은 사안마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말하면, 정의로운 사람은 복잡한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방관자’(판관자)일 가능성이 많다. 비판은 타인에 관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현실에 개입시키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강자의 주관성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은 객관성 논쟁을 요약한다. 내로남불은 언어를 정지시켜버린다. 누군가 이 말을 하면 똑같이 말할 수밖에 없거나 할 말이 없어진다. 이 단어 자체가 틀렸고, 틀린 비유로 현실을 설명하니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일단 세상의 모든 사랑은 ―영원하지 않을 뿐― 로맨스다. 간통죄가 폐지되었으므로, 사랑에 불륜은 있을지언정 불법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불륜은, 결혼 제도 밖의 사랑이 아니라 관계에서 비윤리적인 행동을 말한다. 상대를 존중하고, 감정적 경제적으로 착취하지 않으며, 예의 바르게 이별하는 것 등이 윤리적 사랑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은 로맨스고, 네 사랑은 불륜이다”는 무의미한 말이다. 로맨스의 반대는 불륜이 아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의 정의에 의하면, 상대가 비윤리적이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남의 사랑을 기존의 통념에 기대어 옹호,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객관성 역시 그렇다. 객관성은 유일한 진리를 가정하는데, 객관성이 형성된 과정을 밝혀야 한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객관성이 다른 것이다. 대륙별 시간 차이가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은 없다. 어떤 객관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흑서’의 제목이 좋았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문재인 정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순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산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한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변하지 않는 객관성은 곧 도그마(dogma, 규범 혹은 독단)가 된다. “객관성은 없다”는 의미는 진짜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객관이 어떤 맥락에서만 작동하는 유동적 특성을 지닌단 의미다. 물론, 위와 같은 말은 현실에서 통하지 않는다.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으로 간주되지만, 약자의 주관성은 피해 의식이나 지나친 요구로 여겨진다. 동시에 객관성은 우리가 누구든―권력자든 선한 자든 피해자든 약자든― 타고난 기득권이 아니다.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처럼 여겨져서 투쟁할 필요가 없지만, 약자의 삶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고달프다. 약자에게 객관성은 확보, 쟁취해야만 가능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 “사회운동”이다. 객관성 대신 시트콤 융합적 사고는 새로운 앎을 지향하므로, 객관성을 주장하기보다 객관성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시대와 장소, 말하는 사람의 위치, 정치적 상황 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객관성의 내용은 다르게 구성된다. 그래서 융합적 사고에서는 객관성보다 ‘상황적 지식’을 주장한다. 시트콤(situation comedy)이라고 부르는 그 ‘상황’이다. 시트콤은 거대 서사나 줄거리 전체로 웃음을 유발하지 않는다. 의도치 않은 순간에 웃음이 발생한다. 이는 문화적 맥락을 이해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외국어를 배울 때 “시트콤을 이해할 정도”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객관성은 중립의 대명사다. 그래서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너의 객관’이 ‘내겐 폭력’인 경우가 많다. 객관은 자기(?) 스스로 선재(先在)한다고 주장하지만, 상황적 지식은 지식이 만들어진 조건을 천착한다. 어떤 조건에서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졌는가. 그 과정을 알아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지식은 특정 맥락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지, 만사에 적용되는 지식은 없다. 시트콤처럼 어떤 테두리, 상황, 패러다임 안에서만 ‘웃기는 것이다’. 다른 상황에서 그것을 재연하면 ‘썰렁한’ 이유가 그것이다. 흑서와 백서에서 각자 소명하려는 진실의 근거는 검찰, 언론, 문재인 정부, 진보 세력의 타락 등 하나의 잣대뿐인 것 같다. 사건의 경중과 의미, 사건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개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앎이 생산된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백서’식의 사고는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상대방을 이기려는 의지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자신의 입장을 경유한 부분적인 것이다. 진실을 전제하면, 부분성, 상황성, 맥락성은 드러날 수 없다. 두 권의 ‘백서’의 사례 중에는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건도 있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일, 무관심한 사건도 있다. 이것은 회색인의 관점이 아니라 사안별로 나의 이해(利害)와 관련한 접근이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사안마다 설득력이 다르고, 내가 아는 ‘팩트’와 달랐다. 흑백으로 나누지 말고, 사안별 횡단이 필요하다. 흰색과 검은색은 본디 명도 차이가 커서, 조화가 잘된다. 색상 차이가 클수록 조화롭다. 그래서 도로의 위험 경고 표지는, 검은색과 조화롭지 않은 노란색을 사용한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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