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죽음의 정치학

등록 2020-10-13 16:25수정 2020-10-14 02:41

‘나라다운 나라’는 일차적으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 그 누구의 죽음도 헛되이 하지 않는 사회다. 이 사회가 죽인 약자 한명 한명을 영원히 기억하고, 그 기억의 힘으로 이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 제도들을 바꾸어나가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국 근현대 정치사에서 ‘죽음’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지하듯, 3·1운동을 촉발시킨 촉매제는 바로 (많은 조선인이 일제에 의한 독살로 의심했던) 고종의 사망이었다. 7년 뒤인 1926년의 순종 사망도 6·10만세운동을 촉발시켰다. 해방 이후에는 정권 반대자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종종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자 그 도화선에 불을 지피는 ‘사건’이 되곤 했다. 1960년 김주열의 죽음, 1987년 이한열과 박종철의 죽음이 그랬다. 그사이 1970년에 분신한 전태일은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사회적 타살로 규정지을 수 있는 최근의 세월호 침몰은 박근혜 정권의 명분도 동시에 침몰시켰다. 우리는 흔히 한국사의 ‘역동성’을 상찬하지만, 이 역동성 뒤에 숨어 있는 것은 바로 역사의 분기점마다 누군가가 흘린 피다.

그러나 고통받고 죽는다 해도 ‘모든’ 죽음이 똑같이 기억되어 ‘운동’의 촉매제가 되는 건 아니다. 한국만의 사정도 아니지만, 비극적이게도 약자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대부분은 그 어떤 의미도 부여되지 않은 채 그냥 망각되고 만다. 고종·순종은 태생적으로 조선 500년 사직의 상징이었고, 김주열이나 이한열·박종철은 ‘사회적 운동에 나선 학생’으로서 학생운동의 상징이 됐다. 전태일은 공업화가 탄생시킨 신생 노동계급을 상징하게 됐고, 세월호 침몰의 피해자들은 신자유주의 국가로부터 기본적인 생명의 보호마저도 받을 수 없게 된, ‘나라’가 구조하지 않아 익사를 방기한 서민의 상징이 됐다. 이 죽음들에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아무리 고통스럽게 죽더라도 그 죽음들은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채 유족들에게만 기억된다.

한국에서 가장 전형적인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은 바로 노동자들의 산재 사망이다. 하루 2~3명이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감전사고를 당해 죽는데, 대부분의 경우는 언론매체에서 보도되지 않거나 단신 보도만 된다. 2년 전에 ‘인건비’를 아끼려는 기업의 탐욕으로 혼자 작업하며 컨베이어벨트로 몸을 집어넣어야 했던 김용균 노동자는 머리가 기계에 끼여 절단된 채로 숨졌다. 그나마 이 끔찍한 죽음은 세간의 이목을 끌어 ‘김용균법’의 입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법은 노동자들의 목숨을 보호하는 데에 계속 실패한다. 정부는 ‘위험 작업 2인1조’를 공공부문에서 의무화했다고 하지만, 이 지침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김용균이 일했던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몇주 전에 또 한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하역작업을 하다가 2t 기계에 하체가 깔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도 김용균처럼 혼자 일해야 했던 것이다. 김용균의 죽음은 일시적 주목을 받았다 해도, 노동이 파편화되어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끔찍한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을 끝내 일으키지는 못했다. 올해만 해도 도로공사·주택공사 등이 발주한 사업에 29명의 노동자가 죽었지만, 조국 전 장관 딸의 표창장이나 추미애 장관 아들의 휴가 이야기로 그 지면을 도배하는 보수 언론들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목숨은 파리 목숨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 지경이다.

국내 노동자의 죽음은 그나마 ‘김용균법’처럼, 의도가 좋으나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새 법률의 제정으로 이어지기라도 했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의 죽음은 아예 한국 사회에서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사실, 산재와 산재 사망 위험 노출도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훨씬 높다. 2019년에는, 국내 노동자 전체의 3% 정도밖에 안 되는 외국인 노동자 중에서 전체 산재 사망자의 10%나 나왔다. 고용허가제로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는 비정규직(계약직)이며 대다수는 노조 가입이 되어 있지 않아 늘 위험 업무는 그들에게 손쉽게 전가된다. 그런데 외국인이 소모품처럼 한국인을 대신해서 고위험 업무를 맡아 다치거나 죽어야 하는 이 상황에 대해, 한국 사회는 과연 어느 정도 의식하는가? 기계에 머리가 끼여 절단된 김용균이 만약 중국 동포 노동자였다면 과연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그만큼의 반향이라도 일으킬 수 있었을까?

외국인 공장 노동자들만 목숨을 걸고 일하는 것도 아니다. 가사·육아 노동자로 그 성격이 규정될 수 있는 이주 여성들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 들어온 결혼이주민 여성 가운데 절반 정도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사이에 그로 인해 15명의 외국인 여성이 희생됐다. 한국에서 산재와 폭력,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죽음에 노출돼 있는 외국인의 삶을 본격적으로 개선하고자 한다면 노동자들을 현대판 시한제 노예로 만드는 고용허가제를 폐지하여 노동허가제로 대체해야 하며, 남편의 폭력이 신고되는 경우에는 결혼이주민이 이혼을 하고 독립해도 한국에서 계속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계속 죽어나가도 그 죽음에 사회가 의미 부여하기를 사실상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가 여론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

망각당하는 끔찍한 죽음은, 국내외 노동자들이 계속 죽는 공장과 공사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38선도 여전히 사람들을 죽인다. 최근에 월북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 공무원을 북한군이 사살해서 한국인의 분노를 유발했지만, 7년 전에 한국군이 임진강에 뛰어들어 월북을 시도한 남아무개씨라는 남한 주민을 사살했을 때에는 여당도 야당도 그 어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월경자’를 사살해도 되는 ‘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남북 양쪽 군부가 그다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군부의 이와 같은 통제에 양쪽 사회도 분단 70여년 동안 익숙해져 한쪽에서 삶의 무게를 더는 감당하지 못해 보다 나은 삶을 찾으려고 다른 쪽으로 가려는 사람을 재판도 없이 사실상 사형 집행해야 하는 ‘이유’를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남북한 양쪽의 헌법상 여전히 하나의 나라로 돼 있는 한반도의 판도 안에서 이동의 자유를 실현해보려는 것은 정말 ‘죽을죄’인가? 북한으로 보내는 것보다 저승으로 보내는 게 더 나은 것인가? 이게 과연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인명 존중의 태도인가?

‘나라다운 나라’는 일차적으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 그 누구의 죽음도 헛되이 하지 않는 사회다. 이 사회가 죽인 약자 한명 한명을 영원히 기억하고, 그 기억의 힘으로 이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 제도들을 바꾸어나가야 한다. 그 어느 희생자도 잊지 않고 모든 죽음에 평등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변혁의 원동력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한동훈의 ‘생닭’과 윤석열의 ‘대파’ 1.

한동훈의 ‘생닭’과 윤석열의 ‘대파’

대통령이 위험하다 [세상읽기] 2.

대통령이 위험하다 [세상읽기]

조국이 뒤흔든 선거, 정치 지형까지 바꿀까 [박찬수 칼럼] 3.

조국이 뒤흔든 선거, 정치 지형까지 바꿀까 [박찬수 칼럼]

‘푸바오 열풍’에 가려진 판다 공장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4.

‘푸바오 열풍’에 가려진 판다 공장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파묘, ‘대파 무덤’ [유레카] 5.

파묘, ‘대파 무덤’ [유레카]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