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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우리의 비도 오고 그래서] 비의 어원 찾기는 대실패…떡비야 내려라

등록 2020-10-18 15:39수정 2020-10-19 02:07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너에게 띄우는 글’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작가님, 저도 그래요’ 혼잣말을 하며 출근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달 중순께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그날의 기상청 예보를 확인한 뒤, 책상 위에 꺼내두었던 5단 우산을 한달째 그대로 놓아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산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 ‘예쁜 우산은 일단 사고 본다’는 나만의 쇼핑 원칙이 있는데, 올여름이 끝날 때쯤 샀던 그 우산은 이제까지 한번도 펴보지 못했다.

지난달 중순부터 이달 중순까지 비가 온 날을 세어보면 다섯 손가락을 다 접지 않아도 된다. 기상청 통계를 보면 지난달 16일과 19일 서울의 하루 강우량은 0.3㎜로 찔금 비가 온 흔적이 있다. 추석 연휴였던 지난달 30일에는 38㎜의 비가 내렸지만 이 역시 미미했다. 가끔은 지저분한 내 마음을 씻어줄 소나기 한번 시원하게 내려주길,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멍때리고 싶은 건조한 가을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이달 누적 강수량과 저수용량이 충분해 가뭄 걱정이 없다지만, 올해도 월동채소 파종 시기와 가을 가뭄이 맞물려 농민들 속이 타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비는 왜 비라고 불렸는지 아니?”

기후변화팀 기자로 살다 보니 인생 중 역대 최고의 수다쟁이가 되고 있다. 여러 취재원으로부터 기후·날씨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말이 많아졌다. 특히 날씨 칼럼을 시작하고 난 뒤 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던진 이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도 이미 사람들이 ‘비’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이 단어가 생겼을 텐데…’ 비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였길래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어원이 궁금했다.

국립국어원 국어생활종합상담(1599-9979)의 상담원에게 물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 비라는 어휘가 만들어졌는지 안내해드릴 수 없다. 다만 예전부터 ‘비’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세종 29년(1447년)께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보상절>이라는 책에 ‘비’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석보상절은 부인인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이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을 시켜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 불교의 전래 과정 등을 담도록 한 책이다.

실망하지 않고 통사론을 전공한 임동훈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에게도 도움을 요청해보았다. 임 교수는 “비의 어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도 “다만 명사 ‘신’과 동사 ‘신다’에서 보듯 동일한 어근이 명사와 동사로 함께 쓰이는 현상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비’도 동사 ‘비ㅎ’가 있는데, 동사가 ‘비처럼 흩뿌린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어원 전문가로 손꼽히는 또다른 교수에게서는 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라며 아쉬워하는 나를 달랬다. “단음절의 우리말은 어원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보통 단음절은 당시 불렸던 한자의 음과 관련이 있는데 비는 한자(雨·우)와도 관련성이 없어 보입니다.”

한국어 ‘비’의 뿌리를 찾는 과정은 실패했다. 좋아하는 상대의 과거를 알고 싶은 내 마음이 배반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비의 어원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꿀비’(농사짓기에 적합하게 내리는 비)가 내려 가을 가뭄이 조금 해소될 수 있기를, 떡비(가을걷이가 끝났을 때 내리는 비. 떡을 해 먹으며 쉴 수 있다는 뜻) 소리를 들으며 겨울을 준비하고 싶다.

최우리 ㅣ 사회정책부 기후변화팀 기자 ecowoori@hani.co.kr

지난 14일 &lt;한국방송&gt; 뉴스에 방송된 제주 지역 가뭄 소식. 한국방송 뉴스 갈무리
지난 14일 <한국방송> 뉴스에 방송된 제주 지역 가뭄 소식. 한국방송 뉴스 갈무리

‘비’ 어휘가 수록된 것으로 확인된 최초의 기록인 &lt;석보상절&gt;. 위키미디어코먼스
‘비’ 어휘가 수록된 것으로 확인된 최초의 기록인 <석보상절>. 위키미디어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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