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추억 사진 야외 유년시절 어린시절 앨범 게티이미지뱅크
“여기 같아요, 엘페롤! 스페인에서 제일 큰 군항이라고 하셨잖아요.”
조형근 | 사회학자
내가 가리키는 스마트폰 지도 위 한 지점을 보던 아버지는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맞구나, 여기, 이렇게 만이 깊었어. 기억이 난다.” 지친 병상 위 아버지의 눈빛이 30년 전쯤을 좇아 날아가는 것 같았다.
외국 선사의 배를 타던 아버지가 스페인 북서쪽의 항구도시에 갇힌 건 1979년의 일이었다. 배 수리비 문제로 선주와 조선소 사이에 다툼이 생겼고, 배와 선원들은 발이 묶였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던 탓일까, 뉴스 한번 못 탔다. 우리만 애가 탔다. 아버지는 계약 기간 1년을 여섯 달 넘겨 돌아왔다. 늦게 본 자식들을 꼭 안던 그 품이 기억난다.
아버지가 뱃사람이 된 건 어머니가 나를 가진 직후였다. 내가 스물이 되던 해까지 꼬박 스무 해를 바다에서 일했다. 1년 나갔다 돌아오면 한두 달 쉰 후 다시 나갔다. 아버지와 있으면 행복했는데, 행복이 길어지면 초조했다. 아버지는 계약을 따러 날마다 선원송출회사에 나갔다. 그리고 이윽고 부산항 여객부두에서 페리호를 타고 떠났다. 손 흔들고 돌아서면 엄마는 우리를 안고 울었다. 가난한 제3세계의 노동자는 그렇게 외화벌이를 했다. 바닷가 동네의 배 타는 집 아이들은 그래서 너나없이 아비 없이 자랐다. 가끔 어떤 아비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은 한국 배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탄다. 외국인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온 지 오래다. 엊그제는 한국이 2024년부터 이주배경 인구가 전체의 5%를 넘는 다문화 국가가 되리라는 통계청 예측이 나왔다. 지난 10월6일, 영구 귀국한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니로샨을 떠올리게 되는 까닭이다.
니로샨은 스물여덟부터 마흔까지 12년간 한국에서 일했다. 비전문 취업비자(E-9)로 들어와서 12년을 일한 건 거의 기적이다. 이 경우 모든 조건을 다 통과해도 일할 수 있는 최장 기간은 9년8개월이다. 숙련기능인력 비자(E-7)를 따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용접의 달인이었다. 줄곧 한 직장에서 근무했고, 한국어자격시험, 은행저축액 같은 온갖 기준들을 다 통과했다. 파주의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공동체 400명 중 이 바늘구멍을 통과한 이는 그뿐이다.
비자가 바뀌자 니로샨은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다. 딸을 어린이집에 보냈더니 한국말을 금방 잘했다. 친구를 사귀었고 서로 초대하는 이웃도 생겼다. 니로샨은 스리랑카 노동자 공동체의 리더였다. 공동체는 세월호 사건 때 희생자를 위로하는 법회를 열었다. 경찰서와 함께 외국인노동자방범대를 만들어서 순찰을 하였다. 요양원의 노인들을 위로하는 잔치도 열었다. 내가 속한 마을합창단이 찬조 출연했다. 더불어 사는 좋은 이웃이었다.
숙련인력이 된 니로샨은 영주권 신청이 가능했지만 고민 끝에 포기했다. 12년을 한 회사에서 일한 리더였어도 월급이 세후 200만원 남짓이었다. 한국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네 식구가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어서 아내와 딸들을 돌려보냈다. 300만원 넘게 주겠다는 공장들도 있었지만 회사를 옮기면 체류 자격을 잃는다. 돌아가는 길뿐이었다. 이렇게 우리 공동체는 훌륭한 이웃 한 명을 잃었다.
지난 8월8일자, <한겨레>에 ‘용접의 달인’으로 소개된 ‘사말’이 니로샨이다. 스리랑카에서 자가격리 중인 그에게 물었더니 이제는 본명을 공개해도 좋단다. 거기 자세하고 불편한 사정들이 나온다. 아무튼 그는 이제 돌아갔다. 경험을 살려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스리랑카 고용허가(EPS)센터 같은 곳에서 일하면 어떨까? 거기엔 한국인 단기 파견직원밖에 없다. “한국은 저의 두 번째 나라입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예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한국이랑 함께할 생각입니다.”
니로샨 같은 이조차 정착할 수 없는 곳은 다문화 사회 여부를 따질 것도 없이 옹색하고 초라한 사회다. 회사를 옮길 기본권조차 없는 노예규정 탓에 그는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살 기회를 잃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쌓은 소중한 경험을 잃었다.
그래도 그가 이제 가족과 함께 살게 되어 정말 기쁘다. 엘페롤을 찾던 그날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평생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했다. 부디 니로샨이 그의 딸들과 서로 질리도록 사랑한다고 말하며 살기를, 바람대로 한국과 인연을 이어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