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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 / 서한나

등록 2020-10-18 16:59수정 2020-10-19 02:06

비건, vegan. 게티이미지뱅크
비건, vegan. 게티이미지뱅크

서한나|페미니스트문화기획자그룹 보슈(BOSHU) 공동대표

마트에 가는 걸 좋아한다. 거긴 먹을 게 많다. 과자, 치즈, 맥주, 라면, 피자. 이 중 어떤 것은 음식이 아니라는 걸 몇 사람이 알려주었다. 우유를 얻기 위해 소를 괴롭히느라 젖에 고름이 가득하다는 것과 치즈에는 젖고름이 농축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위가 상했으나 입은 그것을 원했다. 와인바에서 파는 치즈플래터의 이름이 젖고름세트라면 안 먹을 텐데, 볶음밥에 두르고 탑을 쌓고 쭉쭉 앞니로 늘이느라 치즈는 잘 팔렸다.

어느 날 국도를 달리는데 닭들이 탄 차를 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앞지르긴 했는데 백미러로 보게 됐다. 그들은 창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빽빽하게 끼어 있었다. 모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백킬로쯤 달리고 있었다.

밥상의 삼계탕이 반려견의 몸을 닮아 거북하게 느껴져도 만취하면 돼지껍데기를 구우며 술을 섞었다. 속에서 비린내가 올라오면 사람을 잡아먹은 것 같은 기분에 후회가 됐다. 그날 본 닭들이 떠올랐다. 처음 맞는 거센 바람. 수상한 자동차 소리. 가는 곳을 안다.

고기로 불리는 동물의 사체를 거부한 건 당위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비질’ 활동가들은 동물을 실은 트럭이 도살장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죽음을 예감한 이들은 말이 없다. 그들의 부자유가 갑갑했다.

하나하나의 성격이 명랑한지 예민한지 우울한지 나는 알지 못했다. 엄마는 뉴스에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나오면 “그 죄를 다 어떻게 받을래?”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내 몸 안에 원혼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달렸다. 백미러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공주에 갈 때, 장성에 갈 때, 늘 보았다. 돼지를 실은 차, 소 한 마리의 목을 묶고 달리는 차, 소의 얼굴.

어떤 운동은 우리가 지금껏 무엇을 강요받아왔는지 파헤치고 기쁨을 찾도록 몸을 끈다. 처음엔 질문으로 온다. 왜 이런 걸 먹지? 왜 이런 걸 입지? 왜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지? 비거니즘, 탈코르셋, 레즈비어니즘은 사람의 몸을 연다.

바뀐 감각과 기존의 일상이 충돌할 때쯤 비건 친구들을 만났다. 사람이 모이면 뭘 굽고 술을 따라야만 마음이 편하던 나는 그들과 함께 양념한 콩고기를 연탄불 맛이 배도록 구웠고 삼겹살용 양파소스를 뿌린 양파를 넣고 깻잎에 싸 먹었다.

지인은 요리를 잘했다. 덕분에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먹으면 좋을지는 알겠는 비건치즈를 먹었다. 훈연파프리카 가루를 넣어 입맛 당기는 이 치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감자튀김 위에 올려서 먹어도 맛있고, 뜨끈한 토마토파스타 위에 숭덩숭덩 넣고 살짝 녹으면 면과 함께 말아서 먹어도 맛있었다. 그들을 따라 비건 술집에 가서 느끼하고 매콤한 깻잎리소토를 먹었다.

일상에 펴진 결심이 이어지도록 도운 것은 주변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편의점에서 구할 수 있는 비건 간식과 식사 대용 음식을 인스타그램에 올렸고, 어떤 이는 유튜브에 비건 레시피를 올려 자정에도 침이 돌게 했다. 누군가는 이것이 비건 제품인지 확인해주는 앱을 만들었고, 나는 채식한끼라는 앱을 통해 지역별 비건 식당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내 몸은 단단해졌고 정신은 개운해졌다. 아직도 바다에 가면 회를 찾지만, 그들의 이름이 회가 아니라 물살이라는 걸 알면, 그러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는 걸 느끼면, 먹기 싫을 때가 올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러니까 플라스틱 용기에 배달된 사체를 뜯으며 뼈다귀 모양이 비치는 트림을 하면서 죽음의 기운을 몸에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장에서 안 받는 우유를 우유 급식으로 마시면서 낙농업계의 배를 불리고 소의 몸을 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햇빛을 보면서 자꾸만 삶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날 나는 국도에서 심경을 모면하고자 속으로 제사를 지냈지만, 그들은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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