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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이단의 시대, 포퓰리즘의 시간 / 이세영

등록 2020-10-18 18:10수정 2020-10-19 10:50

이세영

정치팀장

남자는 오늘도 포교에 열심이다. 곱게 빗은 머리칼에 말끔한 정장 차림이지만, 주름 깊은 이마와 거친 손등에는 가난의 낙인이 선명하다. 서울지하철 6호선 객차 안에서 그를 마주치는 일요일 아침이면, 열 살 무렵 만났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의 단골 레퍼토리는 산속 기도원에서 보름의 금식기도 끝에 영접했다는 ‘십자가’ 신비체험이었다. 교회 안에서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준 이는 나와 친구들 말고는 없었던 듯, 얼마 안 가 그는 교회를 떠났다. 고행 끝에 ‘접신’을 하고 ‘직통 계시’까지 받았던 그에겐 교회 조직이나 성직의 권위 따윈 하찮게 보였던 게 분명하다.

‘코로나 대유행’의 진원지로 낙인찍혀 존립이 위태로워졌지만, 한동안 개신교계 소종파 ‘신천지’의 위세는 대단했다. 신비주의·종말론에 공격적 선교 마케팅을 결합한 그들이 ‘신도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자, 위기감을 느낀 주류 교단은 이단 대책기구를 꾸려 초교파적으로 대응했다. 물론 주류 교단이 배척한 소종파는 신천지가 처음은 아니다. 1950~60년대 전도관과 통일교가 그랬고, 지금은 주류 교단이 된 순복음교회 역시 1980년대까지도 집요한 이단 공세에 시달렸다.

이들은 신들림과 방언, 질병 치유 같은 신비체험을 앞세우며 세속 질서와 교권세력의 타락을 맹렬히 공격했다. 사회적 약자들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고, 이 과정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점도 비슷했다. 당연히 주류 교단 등 교권세력의 견제가 집중됐고, 파문(이단 판정)과 대대적 추방 운동에 직면했다.

기성 권력으로부터 위험 집단으로 불온시 된 세력은 종교뿐 아니라 정치 세계에도 있다. 포퓰리즘 운동이 대표적이다. 정당 질서(=공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며 엘리트와 언론(=교권세력)을 적대시하고, 직접적인 정치 참여 및 지도자와의 강한 일체감(=신비주의)과 사회경제적 모순의 근본적 해결(=종말론)이 강조된다는 점 등에서 포퓰리즘 운동은 소종파 운동의 ‘정치적 쌍생아’라 불러도 지나침이 없다.

이 유사성은 두 운동 모두 제도화(문명화) 과정에서 억압되고 추방된 열정들에 존재론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종교적 열정의 핵심 성분인 신비주의와 종말론처럼, 권력의 행사와 통제에 직접 개입하려는 인민의 정치적 열망 역시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착을 위해선 적절한 제한과 통제가 불가피하다. 길들지 않은 리비도적 충동과도 같은 이 열정들이 방치될 경우, 체제 내부에 끊임없는 불안과 소요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억압된 열정들은 작은 틈새만 주어져도 제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 시기는 대체로 사회적 혼란이 커지고 현행 질서의 권위와 통제력이 약화되는 이단의 창궐기, 정치적 포퓰리즘의 시간이다. 물론 포퓰리즘 운동을 마냥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기존의 동원과 대의 시스템이 누락하고 배제한 이들을 새로운 정치 주체로 복권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소종파 운동이든 포퓰리즘이든 어두운 그늘은 늘 존재한다.

기성 질서를 의심·부정하는 데서 출발한 소종파 운동이지만, 정작 자신의 신념체계나 지도자에 대한 비판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 정당화하는 것은 강력한 소수파 정서와 피억압 의식이다. 종교에선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정치라면 사정이 다르다. 한정된 권력 자원을 배분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의 운명을 움직여가는 일이 정치의 본령인 까닭이다.

‘인민(데모스)의 통치’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불완전한 지혜를 모아 차선의 해결책을 찾아가는 미완의 시스템이다. 따라서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 내가 지지하는 지도자와 내가 일체감을 가진 정치세력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체제는 언제든 적대와 증오심이 지배하는 독단의 쟁투장으로 전락한다.

그 형태가 ‘팬덤정치’든 ‘운동정치’든,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을 필요로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이 곧 민주주의는 아니다.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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