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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긴축의 종말과 재정준칙 / 이강국

등록 2020-10-19 15:23수정 2020-10-20 09:32

이강국 ㅣ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확실하게 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경제학에서 그런 생각 중 대표적인 것은 긴축정책일 것이다. 오랫동안 거시경제학의 합의는 경기변동에 대응하는 수단으로 재정정책은 효과적이지 않고 과도한 정부부채는 경제에 나쁘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글로벌 금융위기(2007~2008년) 이후 선진국들은 경제 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재정확장에 실패했다. 때마침 발표된 하버드대의 라인하트와 로고프 교수의 연구는 정부부채가 지디피(GDP)의 90%가 넘으면 성장률이 크게 하락한다고 보고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 결과는 엑셀 실수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고, 불황으로 정부부채 비율이 높아질 수 있으니 인과관계도 뚜렷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정건전성과 긴축이라는 보수적 교리는 강력했고, 이를 따른 그리스는 경제가 붕괴하고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결국 2012년 국제통화기금(IMF)은 유럽의 교훈으로부터 긴축의 악영향을 인정했다. 또한 위기에 대응하는 통화정책의 한계는 재정정책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긴축의 논리를 약화시켰다. 이제 거시경제학계에도 경제침체기에 재정확장이 효과적이며 경제성장률이 국채금리보다 높은 현실에서 일시적 정부부채 증가를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지난주 열린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연차총회는 긴축의 시대가 가고 재정확장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세계은행의 수석경제학자가 된 라인하트 교수는 부채 위기의 위험이 커지더라도 팬데믹의 충격 앞에 개발도상국들은 우선 빚을 내서 싸워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제통화기금은 선진국 정부가 부채를 통해 지출을 크게 늘려도 향후 금리가 낮을 것이므로 긴축 없이 정부부채 비율이 안정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세계 각국이 코로나19에 맞서 전 세계 지디피의 약 12%에 이르는 엄청난 재정지출을 했다. 국제통화기금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경제 회복이 확실해지고 이력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재정확장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기관의 재정점검 보고서는 인프라의 개선이나 연구개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공공투자가 경제 회복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현재처럼 불확실성이 큰 경우에는 지디피 대비 1%의 공공투자 증가가 2년 후 지디피를 2.7% 높이고, 민간투자를 10.1%나 높이며, 고용을 촉진하는 효과도 매우 크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제 공식적으로 긴축이 종말을 고한 것이다. 특히 팬데믹이 장기 정체와 저금리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는 재정확장이 더욱 중요해진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조다 교수는 자본 과잉과 투자 부족 등으로 역사적으로 흑사병과 같은 주요 팬데믹 이후 수십년간 실질자연금리가 크게 낮아졌다고 보고한다.

세계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재정건전성과 나랏빚 증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높다. 정부도 늘어나는 국가채무를 관리하기 위해 2025년부터 재정준칙을 도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수치의 근거는 모호하며 불황의 한복판에서 이를 제시하는 이유도 이해하기 어렵다. 정부부채 비율이 낮은 한국은 방역과 경제에 모두 성공하여 올해 재정적자와 정부부채 비율 증가도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작다. 정부의 금융자산을 고려한 순부채비율은 더욱 낮아서 2020년 선진국 평균이 약 96%인데 한국은 약 18%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경직된 재정준칙을 도입하는 것은 유연한 재정운용과 필요한 재정확장을 가로막는 긴축의 압력이 될 수 있다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 깊은 불황으로 많은 이들이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한 지금은 정부가 빚을 내어 소득과 일자리를 지켜야 할 때다. 금리와 인플레가 낮고 총수요가 부족한 현실은 확장적 재정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증세는 추진하지 못하면서 재정준칙만 지키려 하는 것은 향후 복지지출 억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으로 재정을 위해 필요한 것도 준칙이라는 족쇄가 아니라 경제 정체를 막고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이다. 사회안전망의 강화와 분배의 개선으로 구조적으로 총수요를 확대하고 청년들에 대한 획기적인 투자로 출산율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국제통화기금도 강조하듯 민간투자와 생산성 상승을 촉진하는 다양한 공공투자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긴축이라는 잘못된 생각은 한국에서도 끝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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