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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진지는 잡수셨습니까? / 명인

등록 2020-10-25 16:13수정 2020-10-26 02:36

명인(命人) ㅣ <회사를 해고하다> 저자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인사할 때가 많다.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은 별일 없이 무탈하고 건강하게 지낸다는 뜻으로 이 인사에는, 밥이 삶과 행복의 바탕을 이룬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말도 흔하게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자고 일어나면 늘어나는 식당들과 이른바 먹방 프로그램은 정말로 ‘먹는 일’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단 뜻일까?

우리 논은 엊그제 벼를 베었다. 옆지기는 쌀 수확량이 평년 대비 20%나 줄었다고 울상을 지었다. 긴 장마에 집중호우로 벼가 제대로 익을 새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런 투덜거림도 함부로 내뱉을 일은 아니었다. 연타로 몰아친 태풍에 벼가 쓰러진 논, 집중호우로 침수되었던 논, 벼멸구 같은 해충 피해로 누렇게 타버린 논, 얼핏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도 낟알이 검거나 하얗게 변해 쭉정이가 되는 흑백수, 아직 베지 않은 곡식의 이삭에서 싹이 트는 수발아 피해로 말이 아닌 논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올해 쌀 생산량은 작년보다 3%나 감소가 예상된다는데 이는 1980년 냉해 피해 이후로 40년 만에 가장 적은 수준이 될 거라고 한다. 그 여파로 쌀값이 올라 벌써 ‘쌀값도 금값’이라는 표제의 기사가 나왔다. 쌀이 이럴진대 배추나 무, 다른 작물들이야 말해 무엇 할까?

기후위기로 우리가 받는 영향은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우리가 매일 먹는 ‘밥’도 예외가 아니다.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을 비롯하여 이미 여러 사람이 우리가 ‘식량난민’이 될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한국은 식량자급률이 낮고 심지어 점점 떨어지고 있는데 기후위기와 감염병 등으로 식량 수출국들이 수출을 제한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마트에 갔는데 쌀이 없고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다면? 이런 상황, 상상만으로도 두렵지 않나? 그런데도 정부의 정책은 이에 대해 거의 무대책에 가까워 보인다.

돈은 먹을 수 없고, 학교는 안 보내도 살 수 있지만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정부부터 국민들까지 왜 이 문제의 심각성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나 역시, 이런 현실을 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되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면 여전히 강 건너 불구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주제에 논들을 보며 부아가 나 씩씩거리는 나에게 40여년간 농사를 지어온 김샘이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쁜 사람들이 모여 살아 서울이 나쁜 게 아니여. 서울에 사니까 사람이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는 거지. 게다가 도시 사람들만 문젠가? 농사도 자연을 거스른 지 오래여.”

깐깐오월, 미끈유월, 어정칠월, 동동팔월이란 말이 있다고 한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해가 길어 농사일이 힘든 오월, 보리타작에 모내기까지 정신없이 바빠 어찌 지나가는지 모르는 유월, 날이 뜨거워 한가롭게 어정거리다 지나는 칠월, 가을걷이에 내내 동동거리게 바쁜 팔월이라 그리 불렀다고. 음력 기준으로 하늘의 섭리에 따라 절기를 지키고 농사월령을 보내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제 화학비료, 농약, 농기계, 비닐하우스로 안 바쁜 철이 없고, 모든 게 빨라져 철도 때도 없는 일이 농사가 되어버렸다고.

이제는 농사도 스마트하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게 지을 수 있어졌다지만, 과연 스마트팜이 기후위기 시대의 농사와 식량자급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예외 없이 누구나 매일 먹어야 사는 밥의 문제를 남의 일로 치부해도 되는 걸까? 대한민국 정부는 언제까지 기후악당의 악명을 유지하며 무늬만 녹색인 ‘그린 뉴딜’로 한가하게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머지않아 정말로 생존이 걸린 인사로 이렇게 말하게 되는 건 아닐까? “진지는 잡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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