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다. 그 시절 어느날 유력 재벌 총수를 만났더니, 대뜸 이러더란다. “나는 대통령이랑 형님 동생 하는 사이란 말이야. 어젯밤에도 대통령 안방에서 대통령 부부랑 우리 부부가 함께 식사를 했어.” “그게 저랑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답은 “그래도 허가를 안 해 주겠나?”였단다.
그 총수가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받아내고자 한 건 자동차 사업 진출 허가였다. 당시 한국 자동차 회사는 4개(현대, 대우, 기아, 쌍용), 포화 상태였다. “이익을 낼 수 있겠냐”고 물었던 김종인 수석은 총수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5000억원씩 10년 적자를 내도 괜찮다.”
김 위원장의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 나오는 일화 속 총수는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다. 당시 재벌 업종전문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김종인 수석이 자동차 사업 진출을 반대하자, 이 회장은 협박에 가까운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김 수석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 2개월 만에 삼성은 기어이 사업 승인을 따냈다.
로비로 탄생한 삼성자동차는 1997년 외환위기 여파를 버티지 못하고 5조원의 손실을 남긴 채 외국 기업에 넘어갔다. 김 위원장은 “이건희 회장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자동차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며 “한 사람의 소원을 위해 5조원을 소각한 셈”이라고 개탄했다.
책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야기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는 삼성과의 결탁이다. 삼성이 이건희에서 이재용으로 후계자를 물려주는 과정에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최측근을 찾아내 로비를 시도한 것이다. 흔히 ‘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렀지만 나는 ‘삼성 게이트’라고 불러야 본질을 정확히 표현했다고 본다.” 김 위원장은 아버지의 로비와 탄핵, 아들의 감옥행을 아울러 “지독한 탐욕의 결과”라고 규정했다.
지난 25일 이 회장 별세 뒤 보수언론은 찬양 일색의 평가를 쏟아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언급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글을 두고도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28일 발인이 있었다. 이에 보수정당 대표의 회고를 빌려 ‘삼성 총수 흑서’의 한 대목을 적어봤다.
손원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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