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필규 ㅣ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처음으로 제대로 인권을 진지하게 접근했던 사법연수원 시절, 한 존경하는 분의 글귀가 다가왔다. ‘인권, 자유와 평등을 향한 끝없는 여로.’ 대립할 수도 있는 가치들을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는 것, 끝이 없음을 알고 끝까지 나아가는 것, 그리고 삶과 일체된 길을 가는 것.
‘형제, 자녀가 탈북자와 결혼해도 괜찮은가?’ ‘자녀의 교사가 탈북자라도 괜찮은가?’ 등의 설문에 관한 신문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괜찮다”가 “괜찮지 않다”보다 조금 높게 나타나 있었다. 탈북자에 전라도 사람을 집어넣고 경상도 사람들에게 물은 기사가 실렸으면 어땠을까. 당장 어떻게 그따위 기사를 실을 수 있느냐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많은 이에게 설문 결과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탈북자 기사와 곧바로 기사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전라도·경상도 기사의 차이는 뭘까. 지역감정이 심해도 다른 지역 사람은 ‘우리’에 포함되지만 아무리 탈북자 인권을 외치더라도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탈북자는 ‘우리’ 중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권의 과정은 ‘우리’의 범주를 확장시켜가는 과정이다.
외국의 한 한국 의류업체에서 노조가 설립됐지만 회사는 단체협상을 거부하고 노조원들을 해고했다. 공장 앞 농성장에 괴한들이 들이닥쳐 자고 있던 여성 노동자 두명을 트럭에 태워 고속도로변 웅덩이에 버렸다. 진상조사를 위해 현지에 가서 두 노동자를 인터뷰했다. 육하원칙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사건의 경과에 대해 묻고 정리했다. 빠짐없이 정리했다고 판단했을 때 같이 갔던 다른 변호사가 물었다. “그런데 웅덩이에 버려졌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전율과 함께 엄청난 창피함이 몰려왔다. 인권이라는 것은 사람의 권리이고 결국 사람을 바라보는 일인데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안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객관적 사실’에만 관심이 있었고 피해자가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너무도 쉽게 놓칠 수 있는 평범한 진리. 인권은 사안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다.
미국의 한 인권전시관을 방문했다. 노예제와 관련된 부분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의 “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자는 그 권리를 향유할 자격이 없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바로 옆에는 여성참정권 관련 부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과거의 여성들은 대학생 등이 될 수 없었고, 계약체결 등의 권리가 없었고 모든 일에 관해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다고 쓰여 있었다. 링컨 대통령의 시절과 여성의 권리가 부정되었던 위 시기가 일치한다.
이처럼 여성의 권리를 철저히 짓밟았던 링컨 대통령은 권리를 향유할 자격이 있었을까. 물론 우문이다. 비록 우리가 인권의 보편성을 얘기하지만 시대적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이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모든 인권은 처음 제기되었을 때는 불법이고, 시기상조이고, 몇몇 튀는 사람들의 튀는 행동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일 수밖에 없음을 얘기해준다. 노예제와 여성참정권의 문제도 그러했다. 세월호 참사가 나기 전까지는 재난이 인권을 고민하는 이들의 ‘인권목록’에 없었다. 인권은 항상 열려 있는 것이어야 한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인권단체들은 인권의 원칙들을 재확인했다. 인권의 존엄성을 기반으로 한 인권존중의 원칙,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의 차별 금지와 취약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의 원칙, 그리고 피해자와 시민사회가 사회적 소통과 참여를 통해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 항상 강조되어야 할 원칙들이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위기는 경제위기 등 사회 전반, 전 분야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인기 없는 인권은 방치된 채 포퓰리즘적 권력 추구, 권력투쟁이 모든 것을 잡아먹는 양상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출입국 분야에서는 다수의 난민신청자의 면접조서를 조작해 난민들을 사지로 내몰고, 공적인 문헌에서 몇몇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을 사실상 열등한 인간 부류로 규정하는 등 반동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국가, 정부, 권력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권의 보장이다. 이를 망각하면 그 존재가치는 없다. ‘인권, 자유와 평등을 향한 끝없는 여로.’ 자 다시 여행을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