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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빈칸에 ‘배우자’ 채우기

등록 2020-10-29 17:21수정 2020-10-30 02:38

한채윤 ㅣ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사망신고 서식을 찾아봤다. 다른 민원서류와 달리 사망신고서는 당사자가 직접 쓸 수 없다. 그러하기에 나를 가장 잘 아는,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작성하면 좋겠다. 이런 바람으로 서식을 살펴보다가 가슴이 뻐근해졌다. 사망자의 혼인 상태를 기록하는 부분이 있는데 네개의 선택지 중에 골라야 한다. ‘미혼/배우자 있음/이혼/사별’. 이미 13년 동안 모든 걸 공유하며 살아온 사랑하는 파트너가 있으니 응당 내 삶은 ‘배우자 있음’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나의 배우자는 과연 배우자로서 인정받을까? 불안하다. 우리는 혼인신고 접수조차 되지 않는 동성 커플이다. 더군다나 신고인의 자격도 ‘동거친족/비동거친족/동거자/기타’에서 골라야 한다. 배우자가 아니라면 친족에 포함되지 않는다. ‘기타’란, 사망자에게 연고자가 없어서 머물던 보호시설의 장이나 사망장소 관리자가 신고하는 경우다. 그럼 하나의 선택지만 남는다. 동거자. 그런데 법적으로 8촌 이내의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이 동거자보다 사망신고에서 우선순위를 갖는다.

나의 사망신고서는 내 삶을 담아낼지, 사망보다 사망보고서 작성이 더 걱정이다. 노후 대책은커녕 사후 대책이 더 절실하다. 살아서는 가족이었고 부부였으나 죽어서는 ‘남남’으로 기록되는 것. 그래서 내 연인이 온당히 가져야 할 유족으로서의 권리가 사라지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가. 가슴 아픈가.

돌이켜보면,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인정하게 된 계기도 이런 사망신고서와 관련 있다. 결정적인 사건은 40년을 함께 살았던 레즈비언 커플 중 한명이 사망했을 때 연방정부가 거액의 상속세를 부과한 일이었다. 배우자가 남긴 유산엔 상속세가 붙지 않는다. 이들을 친구 관계로 규정했다는 의미다. 80대의 레즈비언 할머니는 부부로서 존중받기 위해 정부와 싸우기로 했다. 2013년에 마침내 결혼을 이성 간의 결합으로만 한정 짓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받아냈다. 또 한 커플이 있다. 20년이 넘도록 부족함 없이 사랑을 나누었던 게이 커플 중 한쪽이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둘은 더 늦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지만 이들이 사는 오하이오주는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아 다른 주로 가야만 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상태였지만 작은 의료수송기를 구해 인근의 다른 주로 가서 비행기 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럼에도 3개월 뒤, 사망신고서에 배우자로 등록되는 것을 거부당했다. 오하이오주 정부는 다른 주에서 한 결혼도 부정했다. 이성 간이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이 싸움이 결국 미 연방 차원의 동성혼 합법화라는 역사적 판결을 이끌었다. 2015년의 일이다.

동성 커플이 배우자로 인정받으려는 건 단지 이성애자와 동일해지거나 낡은 결혼제도에 어떻게든 편입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필요한 건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동등한 권리이고, 지키려는 건 최선을 다한 삶에 대한 애도와 존중이다. 그리고 국민을 위해 국가가 응당 갖추어야 할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작동되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다. 지난 10월 초, 국정감사를 하며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인구주택총조사’에 동성 커플도 배우자로 등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라고 지적했다. 국민의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조사의 목적인 만큼 동성 커플이라고 해서 관계를 묻는 칸에 굳이 배우자라고 기입을 못 하게 할 이유는 없다. 통계청은 의도적인 차별은 아니었다며 시정할 방안을 찾겠다고 답했다. 며칠 전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공개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사는 어느 동성 커플을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로 인정하고 피부양자 등록을 한 사실도 알려졌다. 단순 착오라며 등록을 취소할 수도 있지만, 시도 자체는 의미있다. 법률혼 여부와 상관없이 먼저, 있는 그대로의 다양한 삶의 형태를 존중하는 이런 변화부터 조금씩 계속 반복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 프란치스코 교황도 ‘동성 커플의 법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고 이를 지지한다’는 발언을 하셨다. 그래 믿자. 세상은 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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