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란 ㅣ 진주 <지역쓰담> 대표
‘딸기다라이’가 아니라 ‘책다라이’가 됐다. 빨간 플라스틱 대야마다 책 한권씩 담겨 있다. 딸기 대신 하루키가 담기고, 조정래가 담겼다. 스티븐 호킹이 담기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담겼다. 한 다라이 책값은 제각각이다. 1천원부터 1만원 등 사고팔면서 깎아주기도 하고 잔돈을 받지 않기도 한다. 어떤 책은 꼭 읽어보라며 덤으로 준다.
지난 10월 지역에서 처음 열린 ‘한보따리 책방 시장’. 책장에 유물처럼 꽂혀 있던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전 신청한 시민은 누구나 자기 책을 들고나와 몇시간 책방을 차려 사람을 만나고 책을 사고팔았다. 책은 보따리에 싸 오거나 헌 여행용 가방이나 종이상자에 담아 왔다. 돗자리나 테이블을 펴고 캠핑용 의자를 펴고 전을 펼친다. 준비해 온 책방 간판을 세운다. 고부기, 호연지기책방, 10년 만의 외출, 삼승이네 책방 등 책방 이름만으로도 한권의 책을 읽는 듯하다. 적게는 20~30권이지만 책을 분류해 진열하고 가격표를 써 붙인다. 한보따리씩 들고나온 12개의 노점 책방에는 오래전 귀하게 읽었던 책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년 된 가게들과 옛집, 군데군데 도심 텃밭으로 이어지는 동네 골목에서 가을볕 좋은 토요일 오후 모처럼 아이들 소리가 들리고 젊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노랫소리가 울렸다. “책 가지고 우찌 시장을 여노?”라는 동네 할머니들은 ‘알바 안전요원’으로 나섰고, 책방지기들은 주민들과 한데 어울려 떡과 물을 나눠 먹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후원받은 아트빈커피 커피콩 세 봉지, 소소책방 제작 무선공책 5권, 산들유통 양념고기 3봉지, 소담공방 제작 망경동머그컵, 진주문고 도서이용권, 밀알영농 체험키트, 문구류 등 소소한 물품들은 참가자 전원 행운의 뽑기를 해서 나눠 가졌다. 책방 시장으로 온 동네가 네댓시간 동안 떠들썩했다.
언제부터인가 동네마다 있던 책방이 사라졌다. 어릴 적 우리 집 근처에는 대여섯곳의 책방이 있었다. 작은 도시지만 대로를 따라 혹은 대로를 건너 다닥다닥 붙어 있는 책방은 같은 듯 조금 달랐다. 어떤 책방은 삼중당, 을유문고 등 문고판 책을 살 수 있었고, 어떤 책방은 당시 유행하던 만화책과 잡지책을 잽싸게 사기에 좋았다. 어떤 책방은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기에 좋았다. 책 냄새가 좋았고, 빼곡 차 있는 서가와 쌓아놓은 책더미를 헤집고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그 시절 ‘안 사도 되니 침 바르지 말고 깨끗이 봐라’ 하는 주인 덕분에 책방을 도서관처럼 이용했다. 생각해보면 한권의 책 읽기에는 책방에 가는 즐거움, 책을 고르는 즐거움, 책방에서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그리고 책을 완독하는 즐거움 모두 포함돼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11월20일 도서정가제 개정을 앞두고 내놓은 개정안은 우리에게 이런 즐거움을 빼앗아 갈 것이다. 문체부는 책이 공공재이고, 책방이 지역공동체 안에서 공유 공간임과 동시에 지역문화 생산지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 도서정가제가 동네책방을 살리고 지역자치문화를 살린다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문체부는 잘 모르겠지만, ‘한보따리 책방 시장’은 지역에서 책을 씨앗으로 지역공동체를 엮어가는 책문화 움직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획은 아주 조금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예산 지원을 받았다.
이달 7일 지역에서 두번째 ‘한보따리 책방 시장’이 열린다. 35년 동안 지역 책문화를 이끌었던 진주문고와 함께 15개의 보따리책방이 전을 편다. 청년협동조합, 삼봉마을주민들 등 단체가 책방을 열고 목공예가, 교수, 주부, 비정규직 노동자 등 다양한 이들을 책방지기로 초대했다. 어떤 책방지기는 골목에서 강의를 하고 또 어떤 책방지기는 희귀본 책 자랑을 한껏 펼치고, 동네 젊은 가수들은 거리 공연을 하겠다. 지역에서는 이렇게 논다. 11월7일 오후 경남 진주시 평거동 진주문고 앞, 많이들 놀러 오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