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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이건희 회장의 슬기로운 신문 생활 / 안영춘

등록 2020-11-03 13:33수정 2020-11-04 02:39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을 기리는 대다수 신문의 영웅서사는 길고 곡진했으나, 또한 천편일률로 밋밋하고 납작했다. 고인 생전에 매서운 글맛 한번 보여준 적 없는 터에 사후라고 뭘 더 기대할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딱하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이들의 일편단심과 달리, 생전의 ‘임’은 이들의 서열을 살뜰히도 챙긴 듯하여.

중앙, 조선, 동아, 한국경제, 서울경제, 매일경제, 한국, 서울, 국민, 한겨레, 경향…. 이 회장에게 아침마다 오른 조간 스크랩의 순서다. 중앙이야 자기 신문이라 여겨 앞세웠을 테고 한겨레와 경향은 멀리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겠으나, 경제지의 순서를 정한 기준은 짐작하기 어렵다.

스크랩을 만들어 올린 곳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커뮤니케이션팀이었다. 그러나 세계 아이티(IT) 산업을 선도한다는 기업집단의 싱크탱크가 회장님 보실 신문 스크랩을 만드는 풍경은 스마트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궁인들이 했을 법한 고단한 작업의 풍경이었다.

직원이 스크랩할 기사를 골라 주면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122% 확대 복사한 뒤, 한치의 비뚤어짐이 없도록 투명 눈금 필름을 대고 A4 용지에 붙인다. 이것을 복사하면 기사 붙인 테두리에 검은 선이 남는다. 이 선을 수정액으로 지운 다음 다시 복사한다. 그러나 복사를 반복한 탓에 사진이 흐릿하다. 이번에는 새로 사진을 붙여 복사하고, 사진 붙인 테두리의 검은 선을 지운 뒤 다시 복사한다. 그렇게 아침마다 60쪽 안팎의 신문 스크랩이 만들어졌다.

이런 깨알 같은 사실은 2014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슬기로운 해법>(감독 태준식)에 아르바이트 노동자 인터뷰로 소개돼 있다. 아침마다 만만찮은 일정을 소화하려면 속도전이 불가피했을 터이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면접 때 ‘달리기를 잘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던 세계 아이티계의 거인은 고집스럽게 스마트 기기 대신 단순 공정을 길게 거친 수공업의 산물로 세상 소식과 여론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장이 이렇게 접한 세상은 실제 세상과 얼마나 가까웠을까. 스마트 기기는 알고리즘으로 세상을 비추지만, 신문 스크랩은 회장님 바람대로 비추지 않았을까. 아무려나, ‘용비어천가’는 누가 불러도 똑같은 곡조인 것을.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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