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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천만에요, 공짜 점심은 있습니다 / 이원재

등록 2020-11-03 17:01수정 2020-11-04 13:37

이원재 ㅣ LAB2050 대표

원두를 볶아 팔던 우리 동네 커피집이 10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코로나19로 손님은 줄어드는데, 건물주는 임대료를 깎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퇴 뒤 제2의 인생을 꿈꾸던 부부 사장님은 그 꿈을 생각보다 일찍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커피집 바로 앞에는 서울시가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만드는 거대하고 멋진 공공시설이 곧 들어섭니다. 젊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사업도 하고 교육도 받으면서 동네가 훌륭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합니다. 집값도 땅값도 오를 날이 창창하게 보이는 곳이지요. 건물주가 스스로 양보해 임대료를 깎아주면서 건물값도 낮출 ‘착한 사람’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며칠 전 이 지면에서 홍장표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장의 ‘기본소득, 공짜 점심은 없다’는 글을 접했습니다. 모두에게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을 그 글에서는 ‘공짜 점심’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정부 소득주도성장을 이끄는 홍 위원장께 꼭 우리 동네 커피집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현실에서 누가 공짜 점심을 즐기고 있으며 누가 고통스럽게 점심값을 내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정부가 땅을 사서 개발하고 멋진 서비스를 제공한 덕에 동네 땅값이 오른다면, 그런 탓에 임대료는 낮아지지 않고 가게를 10년 지킨 자영업자가 문을 닫게 된다면, 이때 공짜 점심을 즐기는 사람은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건물주입니다. 점심값은 크게는 국민의 세금으로 낸 것이고, 작게는 자영업자의 땀으로 낸 것입니다.

공짜 점심은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다만 평등하지 않을 뿐입니다. 공짜 점심을 즐기는 이들은 임대료를 받는 건물주이며, 사상 최저 금리로 돈을 빌려 수십 채의 건물을 사대고 있는 부동산 투기자들이고,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보조금과 저금리 대출을 챙기고 있는 기업들이고, 평생 소득과 노후 연금을 보장받고 가족돌봄휴가와 재택근무를 활용하며 저리 대출까지 최대한 받아 자산을 늘리고 있는 정년보장 직장의 임직원들입니다.

먹지도 못하는 점심값을 내고 있는 이들은 임대료 내며 장사하는 자영업자들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노동으로 건강을 해치고 있는 사람들이며, 고용과 소득도 불안정하고 노후 연금도 기대하기 어려운 중소기업 노동자와 독립 사업자와 프리랜서들입니다. 수입을 포기하고 온라인 등교를 하는 아이를 돌봐야 하며 빚을 내서 생활비로 쓰고 나중에 일해서 갚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이 나오지 않으면 바로 수입이 끊기는 방과후 교사와 각종 문화예술시설 강사들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이런 세상을 눈치챈 사람이 많습니다. 공짜 점심을 향한 미래세대의 질주가 이미 벌어지고 있습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부동산 투자와 공무원시험 열풍이 그 몸부림입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공짜 점심이 있을 수는 없지요. 우리가 모두가 먹는 점심 전체를 만들 비용을 누군가는 치러야겠지요.

그런데 세상에는 이미 공짜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 그것도 영구적으로 공짜를 누릴 식권을 독차지하고 있는 소수가 있습니다. 부모에게서 그 식권을 물려받은 사람, 단 한번 시험을 잘 치러서 그 식권을 얻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에 평생 땀 흘리면서도 그 자격을 결코 인정받지 못하고 늘 점심값만 내는 다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수에게 ‘왜 공짜 점심을 원하느냐’고 손가락질하는 게 합당할까요? 오히려 ‘공짜 점심을 모두에게 나누자’는 이야기를 소수에게 전하고 설득하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요?

기본소득제는 모두에게 조건 없이 조금씩의 공짜 점심을 제공하자는 취지를 담은 제도입니다. 소수가 독점한 공짜 점심은 무한경쟁과 편법과 부정부패를 부르는 특권이 되지만,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모두가 마음 편히 먹고 일어나 일하러 나갈 수 있는 미래의 점심이 될 겁니다.

꼭 10년 전, 당시 <중앙일보> 문창극 대기자가 ‘공짜 점심은 싫다’는 칼럼을 썼던 일이 떠오릅니다. “무료 급식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당시 논쟁 중이던 학교 무상급식을 반대하던 글이었습니다. 지난주 문 닫은 우리 동네 커피집이 문을 열 즈음이었겠네요. 그 뒤 10년 동안 재벌가 자녀와 일용직 노동자 자녀가 학교에서 함께 나눈 평등한 점심은 우리 사회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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