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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빛나는 여백 / 양창모

등록 2020-11-04 18:04수정 2020-11-05 14:15

양창모 ㅣ 강원도의 왕진의사

“징역살이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혼자 있다가 사람들이 오니까 가족 같고 좋네!” 대문 앞에 앉아 왕진 나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던 할머니는 독거노인이다. 아들은 멀리 살고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어쩌면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약 없는 징역살이는 계속될지도 모른다. 코로나19가 시작된 지 벌써 10개월이 넘어간다. 그래도 나는 차가 있으니 외출도 하고 가끔은 외식도 하고 친구도 만나지만 외딴 시골에서는 차가 없으면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코로나가 없을 때는 마을회관에서 주민들끼리 모여 밥도 같이 먹고 얘기도 했는데 몇달 동안 마을회관은 문을 닫았다. 그 이후로 거의 두달 동안 입맛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하고 우유와 뉴케어(영양 유동식 캔)로 연명하고 계셨다. ‘드실 음식이 없어서 그러신가’ 하고 냉장고를 열어봤다. 냉장고 안에는 과일과 음식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냥 드시질 않는 거였다. “마을회관에서 밥 먹을 때는 잘 먹었는데 요즘은 밥맛도 없고 입맛도 없어. 너무 속상해” 하며 할머니는 울먹였다.

할머니처럼 혼자서 식사를 못 하고 있는 어르신들을 위해 마을 활동가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반찬 서비스를 해드리고 있었다. 마을회관에 모이질 못하니 밑반찬을 해서 직접 가져다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찬의 절반 이상은 바로 개밥으로 간다. 같이 식사할 때는 남김없이 잘 드시던 분들이 혼자 있으면 귀찮아서 밥에 물 말아 먹고 끝내는 분들이 많다고 활동가가 귀띔을 해준다. 그러니 어르신들은 노인회관에서 밥을 먹었던 게 아니었다. 만남이 밥이었고 그 밥이 끊어지자 식욕도 사라졌다. 함께 식사를 할 때 힘이 생기는 것은 밥의 힘이 아니라 관계의 힘이었던 것이다. 어르신들은 말라가고 개들은 살이 찌고 있던 시골 마을에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자꾸 내 밥그릇의 밥을 많이 쌓으려 하지 말고 함께 밥 먹을 사람을 만들자. 힘은 거기에서 나오고 미래는 그로 인해 바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호기로운 생각들도 코로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하늘만 바라봐도 아름다운 가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본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여백이 빛날 때 숲은 더욱 아름답다. 만약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면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여백, 그 관계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모든 에너지는 내 안이 아니라 나와 그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다. 지금 내 안에 있는 에너지조차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실은 많은 부분이 이전의 관계에서 온 것이다. 코로나는 관계의 힘, 그 삶의 에너지를 우리에게서 앗아가고 있다. 나는 그것이 코로나가 입힌 가장 큰 피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많고 마을이란 협소한 공간에 갇혀 있을수록 더 그렇다. 돌이켜보면 서울에 계시는 내 부모님도 징역살이하긴 마찬가지였다. 최근의 통계를 보면 코로나로 인한 30~40대의 치사율은 0.06%인 반면 85살 이상 노인의 치사율은 27%라고 한다. 400배가 넘는 치사율의 차이는 감당해야 할 고통과 고립의 무게도 똑같이 차이 나게 만든다. 세상의 중심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고통받는 사람’이다. 쓰러져가는 택배노동자들의 삶이 변할 때 우리 삶의 속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듯이 고통의 중심은 이 사회에 필요한 변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더 젊고 그래서 덜 위험하고 더 자유로운 세대가 어르신들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운이 좋으면 노인이 되기 때문이다.

휴일, 춘천의 소양강변은 코로나 시국에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나는 강변을 산책하면서도, 아름다운 단풍들을 보면서도 빈방에 혼자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스러운 것을 볼 때,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어쩔 수 없이 생각나는 이들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단풍이 세상에 찾아와도 아름다움에 접근할 길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움에 다다를 수 없는 삶이 있다. 이 속수무책의 가을에 그저 괜찮은지 안부라도 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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