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기준법으로도 부족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까지 만들어야 하는 현실에 등 돌리면서 ‘개혁’을 말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더불어 아프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이렇게 묻는 우리 역시 더 싼 것, 더 편한 것만을 찾으며 이런 현실을 완성하는 데 한몫하고 있지는 않은가?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들이 2020년 11월4일 오전 서울 중구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26차 전태일 50주기 캠페인'에서 요양보호사 근무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김혜윤 기자
50년 전 11월13일에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그의 마지막 외침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것이었다. 너무도 충격적인 이 죽음 앞에 남은 이들의 정직한 반응이란 일단 울부짖는 것뿐이었다. 함석헌은 “태일을 죽인 것은 이 나지, 이 70이 되어서도 아직도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 살 속에 갇혀 있는 나지”라며 절규했다.
하지만 전태일의 이야기는 그의 죽음으로 끝이 아니었다. 또한 전태일만의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를 이어간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전태일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우리가 고뇌하고 번민하며 항상 돌아보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갔던가? 그들이 한 일은 묻는 일이었다. 그들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되뇌며 물음을 던졌다. 육법전서에 엄연히 존재하는 법률이 너무도 우습게 무시되는 현실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근로기준법과는 정반대로 돌아가는 작업장의 일상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래도 무서울 게 없도록 이러한 무법 세상을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또 한가지 아프게 묻는다면, 어쩌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 역시 알게 모르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하거나 조력해온 것은 아닌가?
전태일의 결단 이후 수십년 동안 이런 물음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세상을 바꿔왔다. 하지만 변화가 무색하게 아직도 우리는 매일 전태일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죽음과 비명, 한탄과 절규의 소식을 듣는다. 식사 시간도 모자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허겁지겁 출동한 작업 현장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십중팔구는 사쪽의 경비절감 방침에 따라 안전에 소홀해진 공장에서 육중하고 무자비한 기계장치의 희생양이 된 노동자의 비보가 끊일 줄 모른다. 그런가 하면 마치 새로운 산업혁명의 현장인 양 각광받는 이른바 플랫폼 산업에서 두 세기 전 첫 산업혁명 시절을 연상시키는 과로로 쓰러져가는 배달 노동자 소식이 잇따른다.
이들 죽음 앞에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첫 반응이란 50년 전 그때 그 사람들과 다를 수 없다. 언어라는 언어는 모두 갈 곳을 잃고, 변화를 선포하던 강령조차 구차해진다. 그러나 전태일과 함께 전태일의 이야기를 만들어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잇단 죽음들 뒤에도 살아남은 자들이 떠맡아야 할 임무가 있다. 반세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묻고 또 묻는 일이다.
죽음이 일상인 노동 현장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은 누구인가? 아니, 그런 죽음 없이는 기업이 버틸 수 없고 경제가 돌아갈 수 없다는 이 체제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체제인가? 그리고 이런 체제를 지탱하려고 ‘정치’를 온갖 알리바이의 경연장으로 만드는 자들은 또 누구인가? 근로기준법으로도 부족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까지 만들어야 하는 현실에 등 돌리면서 ‘개혁’을 말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더불어 아프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이렇게 묻는 우리 역시 더 싼 것, 더 편한 것만을 찾으며 이런 현실을 완성하는 데 한몫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딴 데 있지 않다. 묻는 우리가 달라지기 위해서다. 묻는 일 자체가 다른 삶의 시작이고, 우리가 다른 삶을 결단할수록 세상은 변화를 거부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깊은 회의감이 밀려오는 것도 사실이다. 한번이라도 전태일 이야기에 가슴 뜨거워봤을 세대가 오늘날 며칠 만에 몇억원의 불로소득을 챙기는 투기판을 달구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이제 우리는 다른 삶으로 전향할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 능력이 언제라도 우리 사이에서 부활할 수 있음을. 그 믿음 때문에 그가 결단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믿어야 한다. 오직 이 한 믿음을 딛고 다시 출발해야만 한다.
장석준 ㅣ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