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_10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융합은 확장이 아니다 지난번 글이 나간 후 “왜 가짜 뉴스를 페이크 뉴스라고 하느냐, 되도록 우리말을 쓰자”는 요지의 독자 메일을 받았다. 그 독자의 뜻은 감사하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가짜와 페이크의 뜻은 다르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의 반대는 진짜 뉴스가 아니다. ‘페이크’는 가짜 외에 조작, 허위, 속임수 등 다양한 의미가 있으므로 페이크 뉴스가 맞다. 어느 지역의 언어나 마찬가지지만, 최대한 정확한 표현을 위해서는 각각의 ‘우리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어의 경우 영어 단어와 한자 사용은 언제나 골칫거리다. 영어 표현을 한자로 쓸 수밖에 없는데, 그 뜻이 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있다. 바로 이 연재물의 표제인 융합(融合)이다. 융합의 가장 근접한 의미는 통섭(通攝)인데 통섭(統攝)과 발음이 겹친다(두 ‘통섭’은 반대말에 가깝다). 불가피하게 ‘융합’으로 쓰기는 하지만 이 단어의 어감은 통섭(通攝)과 거리가 멀다. “제너럴한 스페셜리스트를 양성한다”, “융합자율전공학부 최대 지원…” 며칠 전 신문에서 본 모 대학의 신입생 모집 광고 문구다. 이 말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이면서도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인데, 듣기만 해도 부담스럽다. 어불성설에, 가능하지도 않다. 융합은 모든 지식을 습득한 다음, ‘녹여서 합하는 것’이 아니다. 애초 융합은 크게 두 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첫째는 학과별로 전문화가 심화되면서 대두한 전인적 교육의 필요성, 둘째는 서구 남성 중심 지식으로는 해결, 해석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가시화하는 새로운 사유 방법론으로서 등장했다. 즉 다른 생각과의 접촉, 그 닿음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과 충돌이 융합의 주요 요소다. 그러나 위에 적은 첫 번째 이유, 학문 간 대화부터 쉽지 않다. 도정일과 최재천의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2015)는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만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는 책이 되고 말았다. 논의의 범주가 넓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임지현과 사카이 나오키의 대화 <오만과 편견>(2003)은 임지현의 통찰 덕분에 ‘실패’ 이유가 책에 나온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최선은,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도이다. 이해도 쉽지 않다. ‘머리’가 아니라 존중과 열린 마음, 지적 호기심, 인격이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융합은 타학문과의 대화를 통해 지식을 확장하거나 공통점을 찾는 작업이 아니다. 지식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 지식의 쓸모와 가치에 관한 논쟁이다. 봉건 시대를 넘어 신, 신분 질서, 자연을 ‘물리치고’ 인간이 앎의 주체가 되면서 지식(인)은 다다익선으로 간주되었다. 지식 자체가 숭배되기 시작했다. ‘서양철학사’를 필두로 근대 학문을 ‘섭렵한’ 이들이, 계몽(啓蒙, en-light-enment)이란 말처럼 사람들에게 ‘빛’을 제공했다. 한국 현대사에서는 양주동이나 이어령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문명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전쟁은, 지식을 양에서 가치관의 문제로 이동시켰다. ‘지식은 무조건 선인가?’라는 성찰과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영화, 소설 모두 베스트셀러였던 <양들의 침묵>은 지식의 윤리를 살펴보기에 적절한 텍스트이다. 연쇄 살인마 렉터 박사는 프로이트의 심리치료(talking cure) 방식으로 옆방 수감자를 자살케 할 정도의 ‘천재’다. 지식인 범죄자는 ‘매력적이다’. 이런 범죄에서 피해자는 소모품으로 다루어지고, 범죄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 좋은 이들의 게임이 된다. _______
인생은 스트라이크 존의 크기 융합의 반대말 중 하나는 거대 담론(grand theory)이다. 거대 담론적 자아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선 타자가 알아야 할 것은 ‘세계프로야구사’가 아니라 상대 투수의 투구 패턴, 표정, 그가 직전에 던진 공이다. 이 같은 작은 단위들의 연속이 인생이다. 비슷한 말로 “신은 디테일에 있다”, “오늘을 산다”, “상황”, “맥락” 등이 있다. 창의적 사고를 위해서는 앎의 규모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플라톤, 공자’부터 공부할 필요가 없다. ‘지금 여기’에서 내게 필요한 공부를 하다 보면, ‘고전’과 만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려면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부터 깨달아야 하고, 또, 깨달아진다. 그 전제는 자신의 현재 포지션(사회적 위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사용하는 ‘이론과 실천의 분리’라는 말은, 지식의 소용에 관한 질문이다. 이론과 실천은 본디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알던 지식이 쓸모가 없을 때, 이런 말이 나올 뿐이다. 현실에 맞는 이론이 없는 것이다. 소용할 이론을 만들면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사유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노동이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현실을 가위로 잘라-재단(裁斷)- 없는 상태로 만든다. 사회적 약자의 드러나지 않은 고통은 권력화된 무지의 대표적 효과다. 지식은 내가 처한 현실에서-기존의 단어로 말하면 미시에서 거시로, 아래에서 위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몸이다. 융합은 새로운 몸, 변태(變態, metamorphosis)의 과정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연속선에서 몸(생각)이 변하고, 다른 지식이 생산된다. 변태는 알아가는 몸, 그 변화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한다고 해서 비정규직, 고실업을 해결할 수 없고 페미니즘을 공부한다고 해서 “난민을 반대하고 박근혜씨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를 설득하기 어렵다. 단지, 당면한 볼 카운트가 우리의 현실이다. 지식은 ‘야구장’이 아니라 ‘스트라이크 존’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스트라이크 존이라는 타자의 포지션에서 앎이 시작된다. 야구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포지션이다. 왜일까. 다음 회는 융합과 포지션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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