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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민주주의 지속의 조건

등록 2020-11-10 16:09수정 2020-11-11 02:38

흐름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성공적 민주화는 합법칙적이고 예상된 결과라기보다 차라리 ‘예외’로 보인다. 싱가포르 등과 달리 한국은 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민주화를 지향하게 됐는가?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극우적 보수 일당 지배의 틀이 오히려 더 공고화된 이웃 일본과 달리 2017년에 적폐 정권을 뒤엎어 세계적 탈민주화 속에서도 재민주화에 성공했는가?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요즘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한가지 해묵은 신화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다. 근대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 필연적으로 민주화가 뒤따른다는 신화다. 공업화가 진행되어 결국 1인당 국민소득이 어느 정도에 달하면 민주주의 지향적인 근대적 대중의 요구에 따라 결국 민주주의가 온다는 것이 이 신화의 내용이었다. 사회학자 시모어 마틴 립셋(1922~2006)이 1959년에 소득 증가와 민주화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이 가설을 내놓은 뒤로는 ‘사회가 근대화되고 부유해지면 민주주의가 발전된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학계의 통설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이 가설이 사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에 뼈저리게 느낀다. 첫째, 구매력 기준으로 각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을 보면,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축에 절대 군주국(카타르)과 함께 실질적으로 권위주의에 가까운 체제를 운영하는 ‘형식적 민주국가’ 싱가포르 등이 들어 있다. 오히려 기록적 치부(致富)는 권위주의적 행정부가 분배할 수 있는 자원을 늘림으로써 민주화운동의 동력을 약화시킨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둘째, 같은 지역에 위치한 이웃 사회들을 보면, 권위주의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보다 오히려 더 부유할 때가 많다. 대놓고 비자유민주주의를 선호하며 중국을 학습한다고 선언한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장기 집권하는 헝가리는, 이웃의 비교적 더 민주적인 슬로바키아보다 1인당 소득이 약간 더 높다.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당-국가 체제를 운영하는 중국의 구매력 기준으로 본 1인당 국민총생산(1만7천달러)은 다당제가 비교적 잘 정착된 몽골(1만2천달러)을 압도한다. 셋째, 도널드 트럼프 치하의 미국에서 확인된 것처럼, 오랜 민주주의 발전을 경험해온 ‘정통 민주국가’마저도 이제 가면 갈수록 권위주의적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경제가 아무리 성장해도 민주화보다 오히려 탈민주화야말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세로 보인다.

이와 같은 흐름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성공적 민주화는 합법칙적이고 예상된 결과라기보다 차라리 ‘예외’로 보인다. 싱가포르 등과 달리 한국은 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민주화를 지향하게 됐는가?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극우적 보수 일당 지배의 틀이 오히려 더 공고화된 이웃 일본과 달리 2017년에 적폐 정권을 뒤엎어 세계적 탈민주화 속에서도 재민주화에 성공했는가? 1987년 민주화의 동력, 그리고 2017년 재민주화의 동력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이웃 4강인 미·중·일·러와 달리 부재하거나 퇴보하지 않고 오히려 최근에 더 강하게 정착된 한국 민주주의가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의 동력은 크게 봐서 군부 독재의 두가지 치명적 결점, 즉 민족·국민적 정통성과 재분배 정책의 부재였다. 예컨대 세계 패권국가인 미국과 동등하게 ‘맞짱’을 뜰 수 있음을 계속 과시하는 중국의 당-국가와 대조적으로 전두환 군부는 미국의 보호막 밑에서 자국민을 학살한 정권이었다. 또한, 공공의료보험이나 연금을 운영해온 일본의 자민당이나 공공임대주택 시스템을 운영해온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과 달리 전두환 독재 시절은 복지 또는 재분배의 황무지였다. 국민건강(의료)보험이나 국민연금은 1987년 이후, 성난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태우 정권에 의해서 비로소 전 국민 대상의 전면 시행이 이뤄졌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2008~17년간의 적폐 정권들도 같은 문제들을 드러냈다. 이명박 정권 초기의 대미 굴욕외교가 2008년의 첫 촛불 저항을 불러왔으며, 인권과 함께 아픈 역사를 무시한 2015년 이른바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는 박근혜 정권의 지지율을 상당히 떨어뜨렸다. 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위안부 합의’ 파기나 재협상을 요구한 여론은 적게는 약 60%, 많게는 75%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미·일에 굴종하는 적폐 정권은, 동시에 자국민들에 대한 재분배도 소홀히 했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약 8%였던 국민총생산 대비 공공복지 지출은 박근혜 정권 말기에 10%가 됐지만, 노령화하는 초저출산 사회의 복지 수요에 턱없이 못 미치는 조족지혈이었다. 거기에다가 적폐 정권의 기록적 부패와 무능이 가미돼, 결국 정권 몰락과 재민주화로 이어졌다.

촛불 민심은 일차적으로 박근혜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분노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주권이 더 공고하고, 노동자 등 다수에 대한 보호와 재분배를 통해서 민생이 더 안정된 나라를 원했다. 이 두가지 욕구가 충족되면 온건 보수 또는 온건 자유주의가 한국 정치의 중심축으로 그 자리를 굳혀 민주주의가 장기적으로 확고부동하게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두 문제에서 현재 자유주의 정권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극우가 또다시 정권을 잡아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가능성도 앞으로 얼마든지 있다. 한국에 여러모로 가까운 미국에서 벌어지는 극우 포퓰리즘의 광란이나 일본에서 지속되는 극우 신민족주의자들의 장기 집권만을 봐도 그런 시나리오 또한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동맹’ 속에서의 한-미 관계는 그 본질상 평등할 리가 없다. 어디까지나 애초부터 후견국과 피후견국 사이의 관계다. 그래도 그 틀 속에서도 다수가 지지할 수 있는 주권 확립을 위한 행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유엔 제재가 금지하지 않는 대북 인도적 교류나 인적 교류, 문화 교류를 늘릴 수 있으며 역경 속에서도 평화공존을 향한 의지를 더 확고하게 드러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백해무익한 각종 중국 ‘견제’ 포위망에 한국이 참여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는 것도 주권 확립의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포괄적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장기적 로드맵 같은 것이다. 현재 정권은 2022년까지 국민건강보험 보장성을 70%까지 높이겠다고 약속한 바 있지만, 그것보다 이탈리아나 슬로베니아 등 한국과 경제 수준이 비슷한 대부분의 나라가 이미 운영하는 무상 의료라는 이상을 언제,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장기적 비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코로나가 공공의료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만큼, 공공의료 병상 비율을, 세계 최저에 가까운 현재의 10%에서 적어도 30%까지 어떻게, 언제까지 늘릴 수 있을지 자세한 비전을 밝혀야 한다. 대학 평준화, 무상 교육을 향한 행보와 함께 ‘마음 놓고 아플 수 있는 나라’ 만들기는 한국형 복지국가 프로젝트의 핵심일 것이다. 주권 확립과 함께 현재 집권 중인 자유주의 세력이 이런 프로젝트를 내놓을 수 없으면 차후 언젠가 ‘적폐 정권 시즌2’를 또 맞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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