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복주 ㅣ 정의당 부대표
2020년 12월, 영화 <조제>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15년 전 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제작되었고, 장애 여성이 주인공이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2002)가 흥행을 한 이후였다. 그리고 독립영화로 <아빠>(2004, 이수진 감독)와 <숨>(2011, 함경록 감독)에서도 장애 여성이 등장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장애 여성 조제와 평범한 대학생 츠네오의 연애, <오아시스>는 장애 여성 공주와 막 출소한 종두의 연애가 주된 내용이다. <아빠>는 발달장애 여성 민주의 성적 욕구를 아빠의 입장에서 해결하는 과정이고, <숨>은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 여성 수진의 이야기다. 내가 네 편의 영화에서 주목한 것은 영화 속 주인공인 장애 여성들의 관계와 섹스에 대한 부분이었다.
네 편의 영화에서 장애 여성들의 관계의 시작은 ‘몸’이었다. 공주는 비틀거리고 언어장애가 있는 뇌성마비 장애 여성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라디오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비장애 남성인 종두의 성적인 침탈이 관계를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공주는 라디오를 넘어선 세상을 만나기 위해 종두의 성적인 침탈을 용서했을 수도 있다. 조제도 통제되고 가려진 몸으로 새벽녘 유모차를 통해 보는 제한된 세상과 소통한다. 비장애 남성 츠네오와의 연애가 시작되면서 낮에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만나고 바다를 여행하게 된다. 발달장애가 있는 민주는 늘 집에 있다. 민주의 유일한 친구는 자신의 몸이었다. 그래서 자위를 통해 자신과 놀이를 한다. 언어장애가 있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지만 빠른 걸음으로 시설에서 심부름, 청소 등을 하는 뇌성마비 장애 여성 수진은 시설의 은밀한 장소에서 같은 시설의 지적장애가 있는 민수와 섹스를 한다.
공주와 조제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시작한 관계라고 한다면, 민주와 수진은 몸의 욕망과 성적 욕구로부터 시작된 관계일 것이다. 영화에서 장애 여성의 몸은 성폭력을 경험한 몸,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몸, 성관계를 욕망하는 몸, 자기통제권을 갖기 위해 애쓰는 몸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표현되는 장애 여성은 수동적이고 성적인 대상으로 그려진다. 현실을 반영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지만 좀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하는 힘 있는 장애 여성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늘 아쉽다.
이렇게 시작된 관계들의 결말은 다르다.
온종일 자위를 하는 민주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수진은 주변에서 보호하거나 해결해줘야 할 문제를 가진 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문제를 가진 몸으로 간주되기보다 적극적으로 다른 상상을 해보면 어땠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민주에게는 안전하고 즐겁게 자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거나, 수진에게 자신의 장애에 맞는 피임법과 사적인 공간이 확보됐다면, 좀 더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성적 실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주는 종두와 연애를 하면서 종두에게 똑똑하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종두는 공주에게 순종적이고 헌신한다. 하지만 공주의 가족은 종두와 공주의 성관계를 알고 종두를 성폭력범으로 신고한다. 경찰은 종두에게 “넌 저런 애를 보고 흥분되냐?”라는 말을 하고, 성폭력이 아니라는 공주의 말은 듣지 않는다. 다시 감옥으로 간 종두를 공주는 기다린다. 공주의 언어는 그저 다 삭제되었다. 조제는 “의미 없이 데굴데굴 굴러가다가도 물 밖으로 나가면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다”라는 독백을 하고 츠네오와 특별한 이유 없이 사랑이 다 된 것처럼 쿨하게 이별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조제의 독립생활을 암시하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가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조제의 미래를 예측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공주보다 조제의 미래가 더욱 경쾌하게 상상이 되었다. 이번에 개봉되는 한국판 <조제>에서 다른 상상이 가능하길 기대한다. 영화 속 장애 여성의 모습이 역동적이고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