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ㅣ 책지성팀 선임기자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말에서는 어쩐지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 슬픈 간절함을 담은 구호와 같다는 점에서다. 새마을운동의 대상이 되는 마을이 아직 ‘헌 마을’인 것과 같은 이치로, 세계화를 부르짖는 한국문학은 여전히 세계화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뜻으로 읽히는 것이다.
그렇지만 2020년 올해 한국문학은 이른바 ‘세계화’의 척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성란의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는 미국의 출판 전문지 <퍼블리셔스 위클리>가 선정하는 ‘올해의 책 10’에 뽑혔다. 그에 앞서 김이듬 시집 <히스테리아>는 전미번역상과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동시 수상했다. 비슷한 무렵에 김영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독일 독립출판사 문학상을 받았고, 지난 4월에는 손원평 소설 <아몬드>가 일본 서점대상 번역소설부문에 뽑혔다.
이렇게 한국 작가들이 국외의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그에 도전하는 한편에서는 한국의 문학상을 외국 작가들이 받는 일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올해로 각각 10회와 4회를 맞은 박경리문학상과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이 대표적이다. 박경리문학상은 응구기 와 티옹오, 이스마일 카다레, 아모스 오즈 같은 세계적 작가들을 수상자로 배출했다.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을 1회 수상자로 삼은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은 팔레스타인 작가 사하르 칼리파와 소말리아 작가 누루딘 파라에 이어 올해에는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를 수상자 명단에 올렸다.
1997년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영문학권 최고 문학상인 부커상을 거머쥐면서 일약 세계적 작가로 떠오른 아룬다티 로이는 그 뒤로는 소설이 아닌 논픽션에 주력하다가 첫 소설 발표 뒤 20년 만인 2017년에 두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를 내놓으며 소설로 돌아왔다.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심사위원회가
요약한바, “미국의 외교정책, 세계화와 신제국주의, 인도의 핵무기 개발과 댐 프로젝트, 소수자 탄압과 카스트 제도” 등을 대상으로 한 로이의 전방위적 투쟁은 그를 21세기 저항 문인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10일 오후 온라인 회견으로 한국 기자들과 만난 로이는 자신에게 문학과 투쟁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강조했다. “작가의 역할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쓰는 것”이며 “예술과 정치를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서구의 자유주의 담론은 현상 유지에 기여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시에 소설을 정치적 메시지 전달 수단으로 삼는 데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정치든 젠더든 세계 속에 존재하는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쓰는 것이 나의 소설”이라며 “픽션(소설)은 더 깊은 진실을 전달한다”는 말로 소설에 대한 믿음을 표현했다.
그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과 <지복의 성자>를 읽어보면 작고 연약하며 소외된 존재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섬세한 공감과 분노가 그의 정치적 에너지의 원천임을 알 수 있다. 그는 2004년에 번역 출간된 정치평론집 <9월이여, 오라>에 실린 글 ‘홍수 앞에서’에서 “나는 국가가 아니라 강과 계곡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작은 것들의 신>의 독자들을 매료시킨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묘사가 그의 이런 바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자연은, 어린이·여성·빈민·성소수자 등과 함께, 힘 있는 자들에게 핍박받고 생존의 위협에 내몰리는 대표적인 약자에 속한다.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픽션은 내게서 춤추듯 흘러나오고, 논픽션은 내가 매일 아침 일어나 맞이하는 이 고통스럽고 깨진 세계가 비틀어 짜듯이 내보냅니다.”
2002년 래넌 재단이 수여하는 문화의 자유 옹호상 수상자로
미국에서 행한 연설 ‘9월이여, 오라’에서 로이는 자신이 쓰는 소설과 논픽션을 이렇게 구분했다. <9월이여, 오라>에 실린 또 다른 글 ‘작가와 세계화’에서는 “대체 언제부터 작가들이 논픽션을 쓸 권리를 포기했는지요?”라는 말로 논픽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내게는 동일한 문학적 활동”이라는 10일 기자회견 발언과 통하는 말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가 한갓 문학상에 목매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아룬다티 로이에게서 보듯, 문학과 세계에 관한 근본적 성찰과 실천이 수반되어야 진정한 세계화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