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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어둠으로 우리 달려가봐요 / 서한나

등록 2020-11-22 17:24수정 2020-11-23 02:38

서한나 ㅣ 페미니스트문화기획자그룹 보슈(BOSHU) 공동대표

남희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남희는 그 상황에서 차라리 이럴 것 같아요. 남희는 내가 쓴 희곡의 등장인물인데, 스태프와 배우는 남희가 어디에 있는 것처럼 군다. 연극은 자꾸만 삶을 따라 한다. 삶을 따라 하는 중에 삶이 흐르니까 연습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고민을 많이 하고 연습을 많이 해서 진짜 삶을 구현하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는 것일까.

잔이 비는 족족 조연출은 잔을 걷어 술을 탔다. 맘이 얼마나 급한지 아까운 맥주 다 흘려 빈축을 샀다. 그는 폭포가 쏟아지듯 웃었다. 목소리가 굵고 분명해서 지나가는 말을 해도 집중하게 됐다. 그는 부산에서 연극을 하고 있고, 보슈팀이 대전에서 연극을 한다니까 또 연극을 하러 왔다. 일요일마다 온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인물을 아는 게 신기했다. 그것들은 죄다 나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깊은, 나의 가장 창피한, 나의 가장 나중인… 그런 것들은 언젠간 꼭 쓰게 되지만, 수필이 아닌 희곡이어서 그것들은 회의하고 연습하는 내내 나와 함께했다. 견딜 수 없는 피드백 중 하나는 내가 만든 인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살아 있는 인물처럼 느껴져야 캐릭터를 잘 만든 거라고 했다.

욕망과 고뇌는 현실의 사람을 괴롭히지만, 인물은 둘이 있어야 박동한다. 살아 있는 나는 매일 무언가를 원했다. 어떤 날에는 신부님이 되고 싶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귀가 터지도록 큰 노래를 들으며 외제차를 몰고 싶기도 했다. 원하는 게 많거나 원하는 게 없어서 밤마다 뒤척이기도 했다. 거슬리는 사람이 생기면 다쳐도 따라갔고 햇빛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붙었다. 남자가 쓴 소설에는 나와 다른 여성들만 나왔다. 욕망을 준다고 해도 그것은 남성인물의 욕망을 추동하거나 부각하는 데 쓰였다. 극에서는 변화하는 인물이 주인공인데 여자는 변화하지 않았다.

조연출은 남희를 만드는 데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갈색 양말을 신고서 연습실을 펄떡펄떡 뛰어다녔다. 대본 받은 게 금방인데 대사를 막 읊었다. 그러다 대본에 없는 말도 했다. “날씨! 너무 좋아!” “나무! 완전 예뻐!” 남희는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고 삶을 찬미하는 사람.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남희를 만들면서 엄마를 자주 떠올렸다. “엄마, 춤 배울 때 기분 어때?” 대놓고 묻기도 했다. 그럼 엄마는 말을 해주었다. “같이 춰줄 사람이 있어야 흥이 나지. 손잡아줄 사람만 있으면 여기서도 추지.” 엄마는 거실에서 술을 먹다가도 손을 잡아달라며 일어나서 춤을 췄다. 엄마는 그러다가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진 않을 것 같어”라고 말했는데,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 강아지 얼굴처럼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했다.

연출과 배우는 인물 중에 가장 깊고 연기하기 어려운 사람은 남희라고 했다. 연극을 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연극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뭔가가 있다고. 어려워 힘들어 죽는소릴 하면서도 공연이 끝나면 또 연극하고 싶다고. 나는 불 꺼진 연습실을 빠져나가는 스태프와 배우의 뒤통수를 본다. 이 사람들은 왜 일요일에 안 쉬고 나와서 머리를 싸매는 걸까. 연습을 지켜보다 함께 녹초가 되어서는 캐리어를 끌면서 대사에 관해 묻는 배우와 남희는 평소에 어떤 옷을 입을 것 같다고 말하는 스태프와 함께 은행동(대전)까지 걸어간다. 소나무집에 가서 칼국수가 끓는 걸 본다. “준희는 이 상황에서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준희 역 배우가 묻고 모두가 답할 때는 준희와 우리가 모두 살아 있는 것 같다. 나는 불 꺼진 무대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연극엔 진짜 그런 게 있다니까. 마력이… 무대를 울리고 싶은 충동이.

(※보슈팀은 올 6월부터 대전의 2030 비혼여성과 함께 극을 만들어 공연하는 연극 프로젝트 ‘연극이 끝나고 난 뒤’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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