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철 ㅣ 전국팀장
청와대를 취재하며 쟁여뒀던 물음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내후년쯤 던지려던 물음이다. 그런데 인사로 자리를 옮긴데다 미리 던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실천할 시간이 좀 더 있을 때 말이다.
“대한민국 주류를 지금까지 얼마나 바꾸었습니까?”
주류를 바꾸겠다는 다짐은 문재인 대통령이 왜 정치를 하느냐는 물음에 답하며 내놓은 목표다. 누군가는 이 말을 야인 시절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다가 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어딘가와 인터뷰하다 했다고 전했다. 운 좋게 기회가 온다면 퇴임 기자회견 즈음 손 들어 하고 싶었던 물음이다.
문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1년 반 남았다. 취임 뒤 3년 반을 지난 지금 야심 찬 다짐의 진도는 어디쯤 와 있을까.
문 대통령은 그동안 친일과 반공, 독재와 재벌로 이어진 한국의 주류에 균열 내기를 시도해왔다. 건국절 논쟁을 일축하고, 약산 김원봉을 재조명했고, 평범한 장삼이사의 독립운동을 부각했다. 성과도 있었다. 특히 세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대립 속에 기생하던 극우, 반공 세력을 의회 권력에서 밀어낸 것은 가볍게 평가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래된 과제 몇몇을 따져보면 아직 미흡하다.
회고록과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짙은 회한을 나타낸 검찰 개혁은 여전히 힘겨워 보인다. 검찰은, 성한용 선임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갖은 역경을 헤치고 다시 ‘정권 타고넘기 신공’을 발휘할 참이다. 참여정부의 실패를 뼈저리게 체감한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이 개혁의 칼날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어떤가. 개혁은 진흙탕에 빠졌다. 온전한 모습을 알아보기 어렵게 됐다.
과거 검찰의 신공이 쟁여뒀던 집권세력 비리를 헤집는 것이었다면, 지금 검찰의 신공은 진창 만들기다. 판 자체를 헝클어 분간을 뭉개버리는 기술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청야작전’식 수사, 특수부 일색의 인사, 측근 감싸기로 이전투구의 신호탄을 쐈다. 그 뒤 뫼비우스의 띠를 떠올리게 하는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안팎도, 시비도 분간하기 힘든 무한다툼 속에서 검찰 개혁이란 목표는 이지러졌다. 그저 피곤하고, 지겨운 혹은 질리기까지 한 무언가가 돼버렸다. 개혁의 형체 자체가 흐릿해진 것이다. 검찰도 지키고, 그 와중에 대선 주자 1위라는 이름까지 얻었으니 승자는 검찰주의자 윤 총장이라고 할 만하다.
검찰과의 샅바 싸움에 힘을 빼느라, 더욱 단단한 기득권인 법원 개혁은 시작도 못 했다. 그사이 사법농단 사건 피고인 박병대 전 대법관이 변호사로 복귀했고, 대법원은 세월호 참사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에게 벌금형 확정판결을 내렸다.
정부 간판 공약인 지역균형 발전도 가물가물하다. 수도권에는 이제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몰려 산다. 강고한 주류인 강남의 불패 신화는 치솟는 전셋값처럼 드높아만 간다.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다. 정부는 또 지난달에야 지역균형 뉴딜을 한국판 뉴딜의 핵심축으로 추가했다. 디지털과 그린, 사회안전망 뉴딜에 이은 네번째 축이었다. 이 정책의 순위가 위쪽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노동 문제. ‘어느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숨진 지 50년이 지나도록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말은 여전히 겸연쩍다.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여전히 법 밖에서, 혹은 법조차 닿지 않는 곳에서 ‘너무 힘이 든다’며 스러져간다. 신기술을 앞세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주류의 벽은 자본으로 쌓은 이전 시대의 벽보다 넘어서기가 어렵다. 문 대통령의 아쉬움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는 “전태일 열사는 (노동존중사회가) 아직 멀었다고 하시겠지요”라고 말했다.
갈 길은 먼데, 석양이 드리운다. 그러나 1년 반은 나중 아쉬움을 줄이기에 전혀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서 이쯤에서 그에게 던지지 못하게 된 물음을 던져보는 것이다.
“주류, 바꿀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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