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 ㅣ 정치팀장
“당신이 그요? 정말로 그인 게요? 대답은 필요 없소. 잠자코 있으시오.”
늦은 밤 감옥을 찾은 늙은 추기경(대심문관)이 사내에게 말한다. 사내는 광장에서 죽은 소녀를 되살리는 기적을 행하다 추기경의 근위대에 붙들려 왔다. 도스토옙스키의 말년작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삽입된 ‘대심문관’ 이야기의 시작이다.
체포된 사내는 세상을 살피러 15세기 만에 스페인 땅 세비야에 강림한 예수 그리스도다. 추기경은 곧 사내의 정체를 알아채지만, 뜻밖에도 그를 화형대에 올리려 한다. ‘천상의 빵’을 약속하고 떠나버린 그리스도를 대신해, 오랫동안 ‘지상의 빵’으로 민중을 보살펴온 자신들의 공든 탑이, 사내의 등장으로 붕괴되는 상황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리저리 낯선 길로 양떼를 쫓아버린 게 대체 누구였소? 내일이면 당신도 그 온순한 양떼를 보게 될 것이오. 내가 손 한 번만 들어 보여도 앞다퉈 달려 나와 당신을 불태울 장작더미에 시뻘건 탄 덩어리를 던져 넣을 테니까. 이건 순전히 우리를 방해하러 온 당신 책임이오.”
추기경의 적의는 ‘신은 왜 나약한 인간에게 자유를 줘 영원한 시험의 고뇌 속에 살게 했느냐’는 근원적 회의에서 출발했다. 처음부터 ‘기적과 신비로써’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을 순종토록 하지 않고, 왜 자유의 바다를 고통 속에 표류하며 실낱같은 구원에 모든 것을 걸게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인간의 처지가 이러했다면, 추기경과 그의 집단은 ‘사랑으로 위장한 무책임한 신’을 대신해 기적의 왕홀과 신비의 망토, 권위의 면류관을 보여줌으로써 비겁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을 복종의 평화 상태로 이끈 현실의 구원자라 칭송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이런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한다면, 그가 1500년 만에 찾아온 그리스도라도 화형 말뚝을 피해 갈 수 없다.
이 이야기는 까라마조프가의 둘째 아들 이반이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서사시의 형식으로 전달되는데, 텍스트의 의미는 항상 독자가 처한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어서, 20대 때 ‘자유의지와 구원’이란 신학적 모티프로 접근했던 이 에피소드에서, 오십 줄을 바라보는 지금은 ‘대리인 딜레마’의 정치적 알레고리를 읽어내곤 한다. 그리스도의 대리인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가 추방당하는 역설적 상황이 우리에게 발신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주인을 위해 일하기로 약속하고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이, 위임받은 그 권한을 활용해 주인 대신 자신의 이익을 불리는 상황은, 주인의 자리에 ‘그리스도’ 대신 ‘민주주의’나 ‘인민’, ‘혁명’의 이름을 집어넣어도 무리 없이 뜻이 통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지배’라는 이상을 ‘인민의 동의에 기초한 통치’라는 현실태로 구현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대리인 딜레마’를 구조적으로 피해 가기 어려운 까닭이다.
2016년 초겨울의 광장을 밝혔던 ‘촛불’은 어떤가? 그 촛불을 대리하겠다는 세력이 집권한 뒤 부패한 전임 정권의 권력자들이 차례로 심판대에 섰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열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촛불이 추방하려던 반칙과 특권과 불공정, 불평등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에 공기처럼 편재한다. 팬데믹의 불안과 확대된 격차가 불 지핀 분노 속에서, 4년 전 겨울밤의 우리를 결속했던 연대의 충일감은 어디로 갔는가?
적잖은 이들이 냉담자와 비판자로 돌아섰지만, 대통령의 ‘선의’를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유념할 대목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선의 없이’ 통치하는 권력은 드물다는 점이다. 악해서 실패하는 권력도 희소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니 귀는 열고 시선은 멀리 둘 일이다. “우리를 왜 방해하느냐”는 힐난이나 “전보다는 더 많은 자유를 주지 않았느냐”는 회유, “지금의 노력이 결실 볼 때까지만 참아달라”는 당부와 “무슨 말 하려는지 알고 있으니 부디 잠자코 있으라”는 권면 따위는, 저 세비야의 대심문관에게 들은 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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