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판사님, 저는 재판하면서 장애인이나 외국인을 많이 보게 돼서 정말 놀랐어요.” 재판부 식사 중에 나눈 대화 중 일부다. 아무래도 평소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없다 보니 재판의 당사자로 종종 등장하는 모습이 생소했다고 한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날의 대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사실은 장애인이나 외국인, 성소수자 등을 재판에서 너무 보기 어려운 것 아닐까. 그들에게 재판받을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있는 걸까. 그나마 재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하니 그들은 일상에서 얼마나 가려진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올해 우리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그 존재를 드러냈다.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및 여대 입학에서부터 코로나19 사태에서 불거진 외국인 및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과 차별의 문제,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도 적절한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장애인과 노약자들의 삶,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의 존재,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재판에 임하는 사법의 태도, 처벌 및 방치라는 이분법적인 제도 앞에서 취약점이 여실히 드러난 여성의 재생산권과 ‘정상가족’이라는 통념에 도전해야 하는 비혼 여성의 출산할 권리. 변희수 하사의 군복무에 대한 소신과 의지로부터 시작한 2020년은 엘리엇 페이지의 결단과 연대로 끝맺음을 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자는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렇듯 헌법이 명시한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주권자가 될 수 있어야만 구현될 수 있다. “소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존재나 정체성, 삶의 방식이 사회 내에서 비정상적인 것 내지 병리적 해악으로 취급당하며 거부된다면 그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민주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 그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과 동등한 수준의 인권 존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시민으로서의 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것만이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다수의 의사에 부합하는 방식 아래에서도 소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권자로서 존중받고 인권을 침해당하지 않을 수 있어야만 헌법이 인정하는 민주주의가 구현된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원주의와 관용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동등한 존중은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사회의 기반이 된다.”(유럽인권재판소, ‘Handyside v. the United Kingdom’, ‘Erbakan v. Turkey’)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지체장애인에게 국가가 이동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이동할 수 있는 환경(지하철이나 기차를 타기까지 턱이나 계단 없는 환경, 저상버스의 운영 등)도 조성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이동할 자유는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공적인 장소에서 공적인 인물이 공적으로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발언할 수 있는 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존엄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기는 어렵다. 외국인이 자신에 대한 재판 내용을 제대로 숙지할 수 없고 절차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면 그들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된다고 말할 수 없다. 감염병의 확산으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지고 아동 돌봄의 공백이 커질 때 유독 여성들의 경력이 단절된다면 여성들의 일할 권리는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것이다. 소위 ‘정상성’에서 이탈한 것으로 취급되며 타자화되는 모든 이들은 ‘2등 국민’이 되어 자신의 존엄성을 동등한 수준에서 존중받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의 요체가 자유의 보장이라며 ‘다른 이들을 차별할 자유’도 자유로서 인정되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존재가 그 자체로 존중받을 때, 다수 구성원들에 의해 배제되지 않도록 헌법과 법률이 그들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때, 비로소 구현된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선동을 규제하는 것은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제한’이라고 수차례 판시하였다.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혐오할 자유는 민주주의의 해악이 됨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지금 여기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근로자의 날을 5일 앞둔 지난 4월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민주노총, 이주공동행동, 이주노동자노동조합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코로나19 사태로 더 악화된 인종차별과 재난지원 정책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배제되는 문제, 고용허가제 문제, 농축산어업 이주노동자들의 노동 실태 등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이주노동자들이 근로자의 날에 쉬지 않아 일요일에 모일 수밖에 없어 다음달 1일이 아닌 오늘 기자회견을 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