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인문학의 시대, 왜 과학기술인가”라는 말은 없어
“왜 인문학인가”는 융합이 아니라
과학기술에 인문학을 동원하는 사고
팬데믹 시대 필요한 것은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융합
지난달 26일 한국방송(KBS) 1티브이에서 방영된 <다큐 인사이트> ‘AI 시대, 왜 인문학인가?’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제작진의 진정성과 열의가 느껴지는 ‘좋은’ 다큐멘터리였다.
인공지능과 관련한 여러 가지 사례가 흥미로웠다. 토마토 재배 경험이 풍부한 전문 농부와 인공지능이 토마토 기르기 시합을 벌였는데, 1등부터 5등까지 모두 인공지능팀이 이겼다. 알파고 사건의 재연이다. 운전자가 없는 자율 자동차는 혼잡하기로 유명한 제주공항에서 렌터카 업체까지 주행 시험에 성공했다. 운전을 못 하는 내가 가장 관심 있게 본 부분이다. 한편, 인문학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인문학에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기업도 소개되었다.
“AI(Artificial Intelligence) 시대, 왜 인문학인가”는 낯설지 않은 주제다. 이제 과학과 인문학의 대화, 융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상식이 되었다. 더 섬세한 버전도 많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 들은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홍보. “모두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저희 ○○도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사람 중심의,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비슷한 시기 다른 지자체 광고를 듣게 되었다. “화성에는 습지와 나무가 풍부합니다. … 화성으로 오십시오.” 종일 서서 일하다가 피곤한 상태로 택시를 탔는데, 그런 내용이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인류가 드디어 화성(火星)까지 침략했구나. 정말 ‘뉴스’인 줄 알았다. 이것은 나의 정당한 신경증이다.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이야기였다.
“인문학의 시대, 왜 과학기술인가?”라는 말은 없다
나는 그 프로그램 주장과 지자체의 광고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티브이 프로그램의 기획은 선의였겠지만, 절망과 슬픔을 느꼈다. 그것이 우리 사회 주류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문학은 과학기술을 위해 필요하고 과학기술은 자원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과학기술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반복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문학의 필요’라는 담론은 넘쳐나지만, ‘인문학의 시대에, 왜 과학기술이 필요한가’라는 말은 낯설다 못해, 이해가 가지 않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문과와 이과, 문학과 과학, 인문학과 인공지능을 구분하는 사고 속에서는 불가피한 일이다. 지자체의 광고 내용도 마찬가지다. 모든 분리, 분업은 위계화의 시작이다(그래서 앎의 궁극적 목적은 배제가 없는 온전함-holism-이다).
어느 시대에나 그 사회의 사회구조에 따른 ‘주류 지식’이 있다. 지금은 그 반대지만, 조선시대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을 보라. “과학기술과 인문학은 함께 가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 인문학이 더욱 필요하다”는 여전히 기술발전을 상수로 놓은 과학 중심적 사고이다. 기술만 발전하면 “악당들이 인체 실험”을 할지 모르므로,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차라리, 인문학의 종속적 위치는 두번째 문제이다. 인문학은 대학 안팎에서 모두 절실히 요구되지만, 한국 사회는 인문학자를 양성하지 않는다. 나는 ‘학자’라는 정체성은 없지만, 내가 겪은 인문학자의 열악하다 못해 모욕적인 상황은 다음 지면으로 미룬다.
인문학의 개념
“인공지능은 이성적 판단을 하지만 아직 인간의 감정의 영역까지는….” 이 이야기는 언제나 등장하는 잘못된 정보여서, 언급이 필요하다. 이성과 감정은 모두 근대성의 산물로, 감정은 이성을 설명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차적인 가치다. 이성과 감정은 대립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 둘의 조화는 과제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어떤 모습이 이성적인 모습이고 감정적인 모습인지는, 상황과 문화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이는 인종화, 성별화되어 있다(가령 “흑인 남성은 폭력적, 여성은 감정적”).
이성, 합리성, 일관성은 특정 시기 인간에 대한 개념이었을 뿐 이미 현상학,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정신분석 등에서 수많은 반론이 있었고 지금은 거의 적용되지 않는 이론이다. 이제 형법에서도 용의자의 다중인격 증상을 형량 감경 사유로 보지 않는다. 다중성은 정상이다. 만일 감정이 당대 인공지능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신경생리학에서 연구하는 인간의 기분(mood) 개념을 연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인공지능과 인문학에 대한 논의는 첨단 이미지와 달리, 시대착오적이다.
심각한 쟁점이 또 있다. 기후위기, 기후 폭탄 현실에서 지금 우리가 융합적으로 사고해야 할 주제가 ‘인문학과 과학기술’일까. 고민과 발상 자체를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융합은 과학과 인문학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과학기술+인문학)의 융합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문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분야인가. 문학, 역사, 철학인가. 아니, 사회과학까지? 나도 자주 받는 질문인데, 나는 이렇게 답한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죠. 물론, 그 언어에는 과학기술도 포함됩니다. 인문학 내부도 동질적이지 않아요.” 아마 수학은 인류가 고안한 대표적인 ‘우수한’ 언어일 것이다. 수학자들은 공식(公式, formula)으로 소통한다. 경영학이야말로 언어가 핵심인 학문이 아닐까. 재무의 언어는 회계이고, 인사 관리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피터 드러커는 뛰어난 경영학자이자 인문학자였다.
철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학 할 것 없이 모든 지식은 언어(인문학)에서 출발한다. 첨단기술도 언어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언어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융합은 지식을 인문학과 과학기술로 구분하지 않는다. 생태주의 관점의 자연과학자가 있고, 자본주의의 원리에 투철한 기능주의자가 있다. 전자는 생물학자, 후자는 사회학자라고 불리지만 나는 생물학자와 같은 입장이다. 분과 학문이 아니라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분류가 융합이다.
절실한 것은 인간과 자연의 융합
12월이 되니, 메일마다 올해만의 특별한 송년 인사가 빠지지 않는다. 거의 한마음인 듯하다. 위로와 기원이 넘친다. “힘들었던 한 해, 내년에는 코로나가 물러나길 바랍니다”. 이제까지 한국 사회에서 ‘드러나는’ 기후위기는 홍수나 가뭄 정도였다. 물론, 미군 주둔 기지 등 특정 지역의 환경 오염이나 원자력 문제 등은 심각했다. 그러나 올해는 거의 모든 국민의 일상과 생계가 코로나 상황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문제는 코로나가 종식된다 해도 새로운 바이러스가 출현할 것이라는 것, 팬데믹은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 남은 생애는 ‘방역 속의 삶’이 될 것 같다. 팬데믹은 통치 방식을 비롯해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다. 비대면의 삶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학교가 멈추었다. 곳곳에 설치된 플라스틱(?) 칸막이는 분해되는 재질일까. 인구 천만의 도시(우한)를 ‘간단히 봉쇄’하는 중국의 통치기술과 서구의 ‘방치’는 새로운 거버넌스 연구를 촉발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이윤 추구 의지와 그 의지를 관철시킬 대상이 필요하다. 한때(?)의 노예, 제3세계, 동물, 비정규직 노동자, 무임의 가사노동자가 대표적인 대상들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지구 생명체 전체를 착취한다. 건강 약자, 장애인, 난치병 환자를 위한 과학기술론은 허구다. 수천억, 수조원 규모의 연구비가 드는 도박과 같은 과학기술 연구를 휴머니즘 차원에서만 기획하겠는가. 그런 자본가나 국가는 없다.
말할 것도 없이 팬데믹은 인류에 대한 지구의 복수다. 자본가와 발전 지상주의자들은 재난이 자기 턱밑에 오더라도 ‘노아의 쪽배’까지 부술 태세다. 과학기술에 대한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논쟁 방식이 장단점 나열이다(“세탁기로 여성의 노동이 줄어들었다”). 핵심은 인간의 삶, 환경의 변화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지금 은행은 희망퇴직자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과학기술의 최대 성과는, 실업이었다.
현재 지구상 인구는 78억명. 최근 케냐에서 발견된 ‘하얀 기린’은 단 한 마리 남았다고 한다. 사람이 너무 많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체도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인간 활동의 “불가피한 부작용” 정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언제까지 방역 시대를 살 것인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할 시기가 왔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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