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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2020년, 어떤 시대의 종말

등록 2020-12-08 15:52수정 2020-12-09 02:3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2040~50년대쯤 거의 250년 지속된 구미권의 패권은 종언을 고할 것이다. 이제 201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구미권 헤게모니의 종말도 드디어 가시권에 들었다. 아시아 시대의 세계적인 핵심 국가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한국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완전히 벗어나 친환경 복지국가로 가지 않는 이상 자국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바깥 세계에 모범을 보여주지도 못할 것이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2020년이 이제 곧 저물어간다. 이로써 2010년대가 끝을 맺게 된다. 더 넓게 봐서는, 코로나의 난리 통에 또 다른 ‘종말들’이 앞으로의 세계사적 흐름을 크게 결정지을 것이다.

첫째, 1945년 이후 전후 수정 자본주의가 낳은 ‘중산계급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위기 속에서 파탄을 맞았다. 이 파탄이 가장 가시화된 곳은 바로 신자유주의를 세계적으로 선도해온 미국이다. 한편으로 최상위 1% 미국인의 세금 공제 이전의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 19~20% 정도 된다. 이 비율은 1960년대만 해도 10%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금처럼 된 것은 양극화가 극심했던 1910~20년대의 수준으로 회귀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최하위층 미국인들이 아예 ‘기아’ 상태에 빠진다. 1930년대 초반 대공황 시대처럼 말이다. 믿기지 않지만, 텍사스주 휴스턴 같으면 지금 아동 4명 중 1명이 종종 돈이 없어 배고픔에 시달릴 정도다. 미국 전역에서는 총인구의 약 8분의 1이 적어도 간헐적으로 기아에 노출된다. 자본주의 세계의 종주국인 미국은 전전(戰前)의 시대처럼 다시 한번 별천지에서 사는 부유층과 계속 줄어드는 중간계층, 그리고 언제 기아 상태로 떨어질지 모른 채 불안에 떠는, 커져가는 중하층과 하층으로 나뉜 상태다.

둘째, 전후의 ‘중산계급 사회’와 함께 구미권의 세계적 헤게모니도 이제 드디어 본격적인 종말을 맞기 시작한다. ‘중산계급 사회’는 1945년 이후에 생겨났지만, 구미권의 헤게모니는 18세기 말, 노예무역과 노예노동을 착취하는 사탕수수 농장의 경영 등으로 축적된 자본을 원천 삼아 영국이 공업화를 처음으로 이루어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공업’에 한정해서 살펴보아도, 세계 제조업 총생산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몫(약 52%)은 유럽 전체와 북미를 합친 구미권(40%)을 훨씬 능가한다. 현재 영국의 공업 생산량은 한국 제조업 생산량의 60% 정도밖에 안 된다. 아시아는 이제 18세기 중반 이래로 다시 한번 세계 ‘생산’의 중심이 되었다. 지금 미국과 같은 구미권의 대표 주자가 그나마 여전히 세계적 우수성을 보유하는 분야란 금융과 군사, 본래부터 군사와 연결돼 성장한 일부 정보기술, 학술, 그리고 예능 정도다. 그러나 학술만 해도 이미 2년 전에 중국 학자들이 세계적 과학·기술 분야 학술지 논문의 20%를 차지한 반면 미국 학자들의 몫은 16%에 불과했다. 예능으로 말해도 내가 아는 수많은 러시아나 노르웨이 청년들에겐 지금 미국의 팝보다 한국의 케이팝이 훨씬 더 친숙하다. 군사적 우위는 미국이 보유하는 ‘최종의 카드’지만, 이 카드의 유효기간 역시 약 20~30년 내로 만료될 수도 있다. 해군 군함의 보유 척수로 보면, 중국 해군은 이미 미 해군을 능가할 정도다. 종합해서 말하면 아마도 2040~50년대쯤 거의 250년 지속된 구미권의 패권은 종언을 고할 것이다. 이제 2010년대가 저물어가면서 구미권 헤게모니의 종말도 드디어 가시권에 들었다.

셋째, 아시아의 개발이 구미권의 독점권을 깸과 동시에 기후위기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개발’ 자체가 반성의 도마 위에 올랐다. 만약 세계 평균기온이 2100년까지 3도 정도 오른다면, 중국 상하이가 아마도 엄청난 침수 위험에 부딪힐 것이며,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1700만명이 기후 난민이 될 확률이 높다. 중국이 지금의 계획대로 2049년쯤에 세계 최강대국이 된다 하더라도, 기후 참사는 역사적 성취를 거의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임박한 기후 참극은 세계 진보의 패러다임을 지난 10~20년 동안 극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역사적으로 20세기의 진보는 ‘개발’을 향한 집착을 보수와 그대로 공유해왔다. 분단 시대의 한반도만 해도, 중공업 위주의 산업화는 오히려 북한에서 남한보다 훨씬 더 일찍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제 진보는 저개발 지역의 개발, 그리고 산업화 결실의 더 평등한 분배와 함께 지구적 생산 총량의 제한, 즉 세계적 규모의 탈성장을 외칠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 개발 기회를 박탈당했던 지역들은 그 기회를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지만, 이미 산업화된 지역에서는 이제 기후위기 등 생태계의 문제를 의식해서 생산 총량을 동결하거나 하향 조절하여 그 결실을 좀 더 동등하게 나누어야 한다. 탈성장 이념이 적용되어야 하는, 이미 고도로 산업화된 지역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의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미국보다 17년 더 늦게 이루어졌다. 미국과 달리 제조업 공동화 현상도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운 좋게도 미국과 같은 규모의 사회적 파탄은 모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미국 정도로 기아 노출 인구 비율이 높지는 않지만,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한국의 고교생 중 약 8%는 밥을 종종 굶는 결식 청년이었다. 이제 코로나까지 덮쳐 취약계층의 상황은 더더욱 악화됐다. 구미권의 패권이 약화되어가는 이 시대에 아시아의 다른 신흥 산업 사회들과 함께 한국도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지만, 이 국제적 위상의 대대적 제고만으로는 다수의 한국인이 절로 행복해지는 건 결코 아니다. 부유층이나 중상층에게 여유 자금이 더 많아진 만큼 집값도 천정부지로 계속 오르고 있다. 그리고 크게 오른 국제적 위상과는 대조적으로, 제조업 대국인 한국은 기후 대책과 관련된 국제적 의무를 제대로 다하고 있지 않다. 대통령 자리에 잘못 오른 사기꾼 이명박이 12년 전부터 ‘저탄소 녹색성장’을 약속했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한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지금은 세계 7위다. 1인당 배출량은 비슷한 산업 구조를 가진 일본과 독일보다 오히려 더 높다. 지난해 저먼워치, 뉴클라이밋연구소, 기후행동네트워크 등이 발표한 ‘기후위기대응지수(CCPI) 2020’을 보면 한국은 주요 61개 산업 국가 중 58위(26.75)로, 거의 모든 면에서 실패하고 있는 나라인 미국(18.60) 정도로 낮다.

아시아 시대의 세계적인 핵심 국가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한국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을 완전히 벗어나 친환경 복지국가로 가지 않는 이상 자국민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바깥 세계에 모범을 보여주지도 못할 것이다. 한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는 지금이야말로, 한국식 생태형 복지국가 모델 전환의 장기적 비전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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