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훈 ㅣ 종교학자·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지난 6월, 이 지면에는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의 칼럼 ‘코로나 시대의 인문학’이 실렸다.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대학은 이제 세습자본주의의 통로, 취업을 위한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연구 기능은 대학원으로 옮겨졌는데, “비싼 장비와 실험재료 그리고 여러 해에 걸친 도제식 교육이 필요한 과학기술 분야와, 주로 텍스트 독해와 강독 등으로 구성된 인문학이 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인문학은 대학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도 사실은 대학 인문학 교수들의 일자리 위기일 뿐이다. 이제 인문학은 대학 밖, 특히 인터넷에서 지속될 수 있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김우재의 글에 격하게 반응했다. 나 또한 이 글이 인문학 분야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을 둔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그렇다면 과연 인문학의 쓸모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편이 좀 더 생산적이겠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 대학교수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대학의 정규직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위기를 넘어 생계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비정규직, 프리랜서, 신진 연구자들이다. 인문학 연구에는 돈이 든다. 현대의 인문학은 고전 텍스트 몇 권 읽고 형이상학적인 고담준론이나 그럴듯한 윤리적 훈계를 늘어놓으면 되는 분야가 아니다.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문헌 자료들을 디지털화해야 하고, 그것을 읽고 의미 있는 정보나 이론을 창출해 내기 위한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세상에는 흥미로운 글을 쓰고 통찰력을 주는 강연을 하는 자연과학자들도 있지만, 누구도 그것 자체를 두고 “과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직업 과학에는 돈과 제도가 필요하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는가?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떨어지게 된 것은 인문학이 생산하는 ‘정보’의 질이 과거보다 떨어져서가 아니다. 인문학에는 ‘사상’과 ‘담론’을 생산하는 기능도 있다. 인간과 문화에 대한 지식의 총량을 늘려가는 것이 순수학문의 영역이라면, 인간 사회가 마주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내놓는 것이 인문학의 응용 분야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인문학은 전에 없이 무력해 보인다. 포스트모던 시대 이후 진리에 대한 믿음은 무너졌고, 사실에 대한 탐구는 자연과학이 가져갔으며, 대안에 대한 토론은 사회과학에서 하고 있다. 결국 인문학, 특히 철학에 남은 것은 딱히 정답이 없는 규범적 문제들 정도다.
재난 상황에서 인문학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세계 사상계의 스타 가운데 한 사람인 조르조 아감벤은 최근 마스크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얼굴과 마스크’라는 글에서 얼굴은 인간의 가장 탁월한 정치적 요소이니, 시민들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려고 하는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슬라보이 지제크는 <팬데믹 패닉>(북하우스, 2020)에서 과거와 단절하는 정치적 변화, “재난 공산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전 지구적 통합 관리 시스템”을 제안한다. 스타 사상가 두 사람이 한쪽에서는 마스크마저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체주의에 가까운 체제에 “복종하면서 사유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양극단의 주장 가운데 뭐가 더 나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둘 다 애초에 현재의 인류가 실천할 수 없는 대안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인문학자가 인류 문명의 미래를 제시하는 예언자나 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 시대는 학문의 전문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19세기 즈음에 이미 지나갔다. 인문학의 실용적 기능은 시민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사유의 범위를 넓히는 걸 돕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비록 단순하고 직업적인 작업이지만, 자유롭고 꾸준한 사고를 통해 인간과 사회 현상에 대한 순수 연구에 기여하는 것이 결국은 한 사회의 지적 자본을 증가시키는 길이라는 마르셀 모스의 말을 신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