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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계속, 일하다 죽는 나라 / 이주희

등록 2020-12-21 14:36수정 2020-12-22 02:38

이주희 ㅣ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1970년대 미국의 자동차회사 포드가 만든 핀토에는 결함이 있었다. 후방 충돌 시 연료탱크가 폭발하여 인명 피해를 일으키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포드사의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사고로 인한 사망자 1명의 인명 가치는 20만달러 정도로, 매년 180명 정도가 사망하였으므로 문제를 해결할 경우 3600만달러의 비용이 발생하리라 예상되었다. 반면 도로 위에 있는 1250만대의 자사 차를 회수하여 문제되는 부분을 고치는 비용은 1대당 11달러로 총비용이 1억3700만달러에 이르렀다. 포드사는 비용편익분석 끝에 결함을 고치는 것보다 자사의 차를 타다 사망할 경우 배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판단하였다. 그래서 수리를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산재가 이렇게 많이 발생하는 것도 비용편익분석 끝에 기업이 나름의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일하다 죽더라도 기업이 내야 하는 벌금이 안전 설비에 투자하는 것보다 싸니까 안전한 노동환경을 제공하는 대신 적발되었을 경우 손쉽게 미미한 벌금을 내고 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포드 핀토의 결함은 왜 발생했던 것일까? 60년대 말 미국 자동차회사는 소형 자동차 시장에서 일본과 독일 제조사들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1971년까지 시장에 출시하기 위해 포드는 핀토의 제작 기간을 통상적인 3년 반에서 2년으로 단축시켰고, 그 과정에서 이미 핀토 연료탱크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수정 없이 본래의 디자인대로 생산을 서둘렀다.

이윤 추구를 최우선시하면서 서두르기까지 하면 건물도 무너지고 다리도 끊긴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압축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무엇이든 빨리빨리 만들고 또 짓는 데 익숙한 한국 기업의 운영 방식에는 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고려가 들어올 아주 조그만 틈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포드사의 강력한 로비로 수년간 안전기준을 엄격히 집행하지 않았던 미국도로교통안전국도 1976년 더 강화된 기준을 제시했고, 포드사도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생산된 모든 핀토를 리콜해야 했다. 또한 사상자와 그 가족들이 제기한 많은 소송에서 법원은 포드사에 희생자에 대한 손해배상뿐 아니라 상당한 액수의 징벌적 손해배상금도 지불하도록 명령했다.

고 노회찬 의원이 대표발의했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법사위에서 잠자다 21대 국회에서 다시 깨어날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재계가 주장하는 것처럼 산재에 대한 우리 처벌 수준이 이미 세계 최고인데도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산재 사망자 보유국이라면, 아마도 사법부가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 간 원·하청 중층구조로 인해 사고 예방과 안전의 책임을 가장 크게 져야 할 원청 대기업이 그 책임에서 원천 면제되기 때문일 것이다. 원청을 포함해 사고의 책임을 져야 할 모든 기업의 입장에서 사고 예방이 사후 배상보다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되도록 처벌의 실효성이 강화된 법이 만들어지면 해결될 문제이다.

가장 많은 사고가 일어나는 소규모 50인 미만 기업에 법의 시행을 4년이나 유예해야 할까? 우리 노동법은 가장 어려운 노동자를 가장 보호하지 않는다. 이들은 국회의원과도, 고위공무원과도 친분을 맺기 힘들어 기업만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어려움을 호소할 수도 없다. 만일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의 아들과 딸들이 산재에 취약한 영세기업에서 일하다 죽을 수 있는데도 이 법의 효력을 약화시키거나 긴 유예기간을 두자는 의견이 나올 수 있을까? 이 법만큼은 제발 기업보다 일하다가 떨어져 죽고 끼어서 죽으며 팔다리도 잃는 노동자를 먼저 생각하였으면 좋겠다. 기업이 합리적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규제해야 한다. 또다시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을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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