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정희진의 융합] 융합의 관점-생태, 평화, 여성주의

등록 2020-12-21 17:56수정 2020-12-22 02:37

정희진의 융합 _13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융합은 결합을 넘은 가치관의 문제

‘법과 문학’과 ‘법과 여성’의 의미는 달라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는 학과 아닌 가치관

모두 발전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이들 사상의 위상이 융합의 역량을 좌우

글의 주장과 ‘무관하게’ 일단, 글은 잘 읽혀야 한다. ‘위대한 소설가’가 아니라면, 짧은 문장은 기본. 수식어와 작은따옴표, 감탄과 개탄 등 ‘감정적’(또, 작은따옴표다) 표현도 자제할수록 좋다.

이 중 내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작은따옴표 사용이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글쓰기, 창의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이들에겐 중요한 이슈다. 기존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표식 중 가장 간단한 작은따옴표 사용은, 글쓴이가 사용하는 단어의 뜻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공지하는 행위다.

가령, 내가 생각하는 자유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유의 의미는 다르다. 표현의 자유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내게 자유는 ‘자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다 보면 문장은 온통 작은따옴표투성이가 될 것이다. 작은따옴표는 읽기를 방해한다. 좋게 말하면 생각하는 읽기가 될 수도 있지만, 가독성이 떨어지고 문장이 지저분해지기 쉽다. 이 글의 표제도 원래는 “융합의 관점―‘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였지만 생략하였다.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 혹은 정명(正名)을 거부하는 경합하는 언설이다. 논쟁도 익숙해야 가능한데, 일단 이 세 가지 사상은 한국 사회에서 낯설다. 알기도 전에,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더 많다. 잘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염원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이들 사상은 왠지 기력이 없거나(?) 심지어 한가한 이슈로 인식된다. 우연히 어느 경제전문지에 게재된 경영자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내 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 글이 이상하다는 요지였다. 발전주의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가 너무 신기한 나머지, 비판이 아니라 놀라움을 표현한 글이었다(“대한민국에 경제 발전을 싫어하는 이도 있다니…”).

이 지면에서 세 가지 사상을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왜 개념화가 어려운지는 말할 수 있겠다. 세 가지 사유 모두, 내부에 대립적인 사고가 공존한다. 여성주의도 하나가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도 있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에코페미니즘도 하나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에코페미니즘이 널리 알려졌지만, 영성(靈性)에 관심이 많은 에코페미니즘도 있다.

이 문제는 평화주의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일상과 사회 구조 차원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평화운동도 있고, 평화는 힘에 의해서만 지켜진다는 “평화=전쟁”을 주장하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도 ‘평화(진압 후 평정)’를 다룬다. 환경 정책, 생물학, 불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생태주의를 연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연을 인간 활동의 대상으로 삼지 말자는 주장이다. 생태주의 역시 논쟁적이다. ‘녹색 성장’이라는 모순어가 국정 지표가 되기도 하고, 환경 보존이 주민의 이해와 부합하거나 충돌하는 경우 등 상황에 따라 ‘진정한’ 환경운동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융합이 ‘가성비’가 높은 공부인 이유는, 기존의 지식은 물론이고 그 지식과 융합할 수 있는 자기 가치관을 확립하는 공부가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관점을 확립하고 응용하려면 연습(practice)과 현실 개입적 실천(praxis)이 모두 필요하다.

학과가 아니라 가치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융합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조직은 대학과 기업이다. 기업의 경우 이익 창출의 새로운 방법이나 이미지 제고라는 목적에서 융합이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대학의 경우 ‘융합자율전공학부’ 같은 학과가 있거나 이미 많은 연구들이 다학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융합에 관해 모 대학에서 낸 책을 보니 “문학과 법학”, “자연과학과 인문학”, “예술과 테크놀러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로선 가장 전형적인 접근 방식 같다. 분야와 분야의 비교, 결합 가능성의 모색이다.

하지만, 융합은 주체(사람)와 가치관의 문제이다. 1979년, 이화여대에서 출간된 <여성학>은 “여성과 정치”, “경제 발전과 여성의 지위”, “여성 연구의 인류학적 접근”, “여성 생리와 영양” 등 기존 학문과 ‘여성’을 연결시키고 책의 서두에는 “여성 해방 운동의 이념(정의숙)”, “여성 문제의 본질과 방향(윤후정)”, “여성과 사회 구조(이효재)”를 실었다. 선구적인 시도이자 지금 읽어도 융합의 모델로서 손색이 없다.

법과 문학과 여성과 법, 흑인과 법은 같은 위상의 언설이 아니다. ‘법과 문학’ 같은 주제에도 글쓴이의 관점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여성과 법, 흑인과 법처럼 범죄 구성 요건이나 형량을 좌우하는 영역은 아니다.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는 분과 학문이 아니라 융합에 필요한 세계관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학과’, ‘환경대학원’ 등 전공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평화주의는 더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북한학’이 운영되고 있으며, 핵 문제부터 마음의 평화까지 영역이 넓다. 개인적이든 공동체 차원이든, 피해자의 고통과 가해자의 평화를 자주 경험한다. 평화(힐링) 산업으로 돈을 버는 것까지는 좋은데, 가난한 사람에게 무소유를 강요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아마도 이 모순의 절정은, 미국의 군수 산업 노동자에게 세계 평화는 실업을 의미한다는 현실일 것이다.

나는 학자나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이 없다. 관심 있는 공부 주제는 있지만, 전공은 없다. 내게 여성주의자는 부분적인 정체성이자 가치관의 일부다. 간혹 평화학 연구자로 소개되면 ‘변절자’라는 비난부터 ‘진짜’ 전공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녹색당원이라고 하면, 왜 ‘여성의당’에는 가입하지 않느냐고 의문시한다.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누구나 가져야 할 가치관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또, 경우에 따라 갈등하거나 공명한다.

왜 세계관이 학과로 축소, 게토(ghetto)화되었을까.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학과’로 불리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마르크스주의학과는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관점이고 사상으로 간주된다.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분과 학문에서 이미 융합되었고 학문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바꾸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신분석, 여성주의, 미학, 문학, 미술, 언어학, 역사학, 사회학…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었지만, 여성주의나 생태주의, 평화주의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가치관에 따른 융합

융합이 가치관에 따른 지식의 재구성이라면, 사람마다 다양한 관점이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는 그중 당대 가장 요청되는 사유라고 생각한다.

1988년 인도 출신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가 소설 <악마의 시>를 발표한 후, 다음 해 당시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 정부는 루슈디에 대해 현상금 100만달러를 내걸고 공개사형 선고를 선포했다. 이후 루슈디는 13년간 도피 생활을 했고, 이후 <조지프 앤턴>이라는 자서전을 냈다(그가 존경하는 작가 조지프 콘래드와 안톤 체호프의 이름을 합쳤다).

루슈디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여성단체가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여성들’(WAF, Women Against Fundamentalism)이다. 이 단체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 및 민족의 여성들로 이루어졌다. 이 단체는 이슬람 근본주의뿐만 아니라 이에 반대한다면서 기독교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인종 차별주의에도 반대한다. 여성주의와 평화주의가 결합된 좋은 예이다.

융합은 정치(학)이다. 다른 것들의 접속이되, 더블유에이에프처럼 목적이 분명한 사회운동이다. 자본이나 폭력에 봉사하는 융합인가, 증오와 파괴의 대안으로서의 융합인가. 내가 지향하는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의 공통점은 발전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발전주의는 부국강병주의, 즉 국가나 공동체 간의 힘의 경쟁이다. 강자들끼리 경쟁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와 자연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 결과가 지금 팬데믹이다. 모두가 알고 있다. 코로나 블루는 이 상태가 지속되리라는 인식이지, ‘증상’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멈추지 않는 한, 한국의 경우 수도권 인구 분산이라도 해야 ‘인류 멸망’을 막을 수 있다.

미국의 9·11 사건 때, 어느 여성 노인의 티브이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부자입니다. 너무 많이 소비하고 낭비합니다. 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미국은 이미 다른 나라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부를 나누고 타인에 대한 증오를 멈춥시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을 요약한다. 마르크스주의도 ‘트럼프에게 투표한’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근대 발전주의의 일환이었다. 발전주의적 사고를 누가,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 ‘케이(K) 방역’, 백신 개발 모두 한계가 있다. 우리는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