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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나에게 말을 가르쳐준 여자 / 서한나

등록 2020-12-27 17:36수정 2020-12-28 02:38

서한나ㅣ페미니스트문화기획자그룹 보슈(BOSHU) 공동대표

가는 데마다 모래 씹은 표정 짓던 때가 있었다. 스물둘이란 젊음은 젊은이를 쉽게 비참해지도록 만든다.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원해야 하는 젊은 나는 유희거리나 이벤트도 없는 채 다만 시간이 많았다. 학생보다 등산객이 많고 간간이 소똥 냄새 나는 대학에 다녔다. 교수는 로봇 같고 도서관엔 책도 없는데 밤이라고 다를까. 그 학교 학생들만 갈 데 없어 모인 술집이나마 기웃대다 문만 열어보고 나왔다.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할 거라는 예단을 묘한 자신감 삼아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 싸구려 가구를 갖느니 침대 없이 살겠단 마음으로. 젊음은 부담스러웠고 부담스러운 건 죄다 누추했다. 스물셋,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친구가 말했다. 너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할 것 같아. 어른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없던 때.

지금 내가 말하려는 그 여자. 처음 듣는 한국말로 종횡무진이더니 두시간 동안 날 롤러코스터 태운 그 여자. 이백명 좌중을 압도하고 쉬는 시간의 시끌벅적함을 한순간에 멎게 만든 그 여자. 그 여자의 옆얼굴에는 내 시선을 머무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 여자가 웃을 때 나도 웃었고 그 여자가 찌푸릴 때 나도 찌푸렸다. 그 여자가 골똘해질 때 나도 현실을 떠났다. 삶의 국면에서 만난 여자들이 떠오른다.

오천명이면서 단 한명인 그 여자. 나의 동갑내기, 선배, 선생님, 애인. 기꺼이 삶을 알게 하는, 더 말해달라고 더 가르쳐달라고 청하게 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 여자의 단어를 나도 모르게 배웠고 그 여자의 문형을 익혔다. 사람들이 내 다음 말을 기다릴 때 그 여자에게 배운 기막힌 표현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내 옆얼굴을 쳐다볼 때 나는 그 여자의 표정을 생각했다. 삶이 모두 들어 있는 얼굴도 세상에는 있다는 것과.

진실을 아는 여자도, 모르려고 긴장한 여자도 머리 위에 한 짐 이고 산다. 여자들이 짐의 존재를 평생 감지하면서도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인지하기는 어렵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내게 세상은 질문이었다. 오답이어도 좋으니 누군가 대답해달라는 몸부림이었다.

여자는 세상을 마주한 뒤 의아함을 느끼고 의아함과 화(和)하면서 불화하든 불화하면서 화한다. 여자 손으로 설계되지 않은 세상을 그 손으로 더듬으며 하나부터 열까지 방법을 마련하는 동안 당혹스러움으로부터 통찰을 얻는다. 내가 어디로 흘러왔고 어디로 가려는지 대충 알겠고, 모르겠다 싶은 날에도 키를 내가 잡고 있다는 감각이 생기면 삶이 버겁대도 황망하지는 않다.

넌 꼭 선생님 같아, 내가 말하면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알아듣잖아, 네가. 몸으로 앓다가 퍼뜩 얻은 말들을 방비 없이 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느낀 애절에 가까운 환희. 말마다 명중해 몸 비틀며 웃게 하는 솜씨. 이 세상에는 네가 있고 네 말을 알아듣는 내가 있고 말하는 입을 인내심 좋은 제자처럼 지켜보는 서로가 있다는 안도감.

그런가 하면 시선을 맞추면서 하는 대화가 얼마나 안락하고 짜릿한지 알려주는 여자가 있다. 그는 내가 이번에 쓴 글과 저번에 쓴 글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내가 이 말을 왜 하는지 안다. 단정이 필요할 때 단정하게 하고 확신이 필요할 때 확신하게 하는 그 여자. 고성이 오가는 술집에서 마주 앉아도 어울리고 ‘고급한’ 곳에서 조명을 받는 것도 어울릴 그 여자. 어디에 있어도 말이 되는, 말하는 법을 가르쳐준 그 여자.

너는 알아듣겠지, 그런 믿음에서 한 여자의 말이 시작된다. 어느 날 그에게 확신이 필요할 때 내가 살아온 방식으로 확신을 주겠다고 마음먹는다. 당신이 번쩍 눈을 떠 신통한 이야기를 마구 쏟아낼 때 그것을 단박에 알아듣겠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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